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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정보
ㆍ발행기관 :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ㆍ수록지정보 : 남명학연구 / 38권
ㆍ저자명 : 李相弼
ㆍ저자명 : 李相弼
목차
1. 머리말2. 生涯와 師友淵源
3. 學問과 삶의 態度
4. 맺음말
한국어 초록
大笑軒 趙宗道(1537-1597)는 丁酉再亂 때 黃石山城에서 장렬하게 일생을 마쳤던 분이다. 당시 그 황석산성에서는 대소헌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런데도 그곳에서 죽은 사람으로 大笑軒과 存齋 郭䞭(1551-1597)만 자주 거론되는 것은 이들이 단순히 縣監이란 벼슬아치였기 때문은 아니다. 이들의 행위는 그 자체로도 기릴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었던 것이며, 또한 이들이 황석산성에서 殉死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길이 추앙을 받을 수 있었던, 학문과 행실을 겸비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대소헌의 생애를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그의 학문과 삶의 태도에 대해서 고찰한 결과,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는 합의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첫째, 대소헌은 총명한 두뇌를 타고난데다, 鄭斗·盧禛·曺植 등 당대 경상우도에서 가장 이름난 스승으로부터 학문을 사사하였고, 이러한 학문 풍토에서 함께 강학했던 좋은 벗들을 많이 만나, 여기서 학문이 무르익을 수 있었다.
둘째, 「學校策」이나 「倡義文」 등을 통해서, 대소헌의 학문이 社會的 實踐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었고, 이는 바로 曺植의 학문과 깊은 영향관계에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었다.
셋째, 대소헌은 대범하고 호방한 삶의 자세를 지녔는데, 학문에 의해 ‘大節이 不踰閑’할 수 있었기에 후인의 추앙을 받을 수 있었다. 황석산성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맞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런 삶의 자세와 학문의 역량에 의해서 가능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영어 초록
Daesoheon Jo Jongdo (1537-1597) is a figure who died a heroic death in the battle at Hwangseok Mountain Fortress, where many others were killed during the 2nd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7. Among those deceased, however, only Daesoheon and Jon jae Gawk Jun(1551-1597) are frequently remembered not simply because they were high government officials. Their behaviors themselves are well worthy to be praised and their learning and actions would be respected forever if they had not been killed for their country.This thesis is aimed to look into the life of Daesoheon and consider his learning and lifestyle, from which the following findings may be concluded.
First, Daesoheon was so intelligent even at his young age and studied under the most famous teachers at that time in Right Gyeongsang Province such as Du Jeong, Jin No, and Sik Jo. His studies could be flowered along with his good comrades who were also educated in such a goodly environment.
Second, School Whip, Righteousness Promoting Writings and others show that the learning of Daesoheon was deeply related to and much influenced by social practices.
Third, Daesoheon was revered since he had a manly and large-minded attitude in life and his learning was keeping a great moral cause. It is inferred that he died a glorious death at Hwangseok Mountain Fortress according to such an attitude on life and studies of hi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