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서론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2. 연구의 범위 및 방법
Ⅱ. 만국공법(萬國公法)의 수용과 근대적 대외인식의 형성
1. 고종의 대외인식의 배경
2. 만국공법의 수용과 그 성격
3. 조선의 중립화 정책과 고종의 대외인식의 변화
Ⅲ. 거문도 사건과 대한국(大韓國) 국제의 반포
1. 영국의 거문도 점거와 국제법적 대응
2. 칭제건원(稱帝建元)과 대한국(大韓國) 국제의 반포
Ⅳ.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1. 연구의 필요성 및 목적
‘19세기말의 조선이 과연 외교를 못했는가?’라는 문제는 한번쯤 정밀하게 점검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일반적인 상식과 달리 구한말의 역사에서 상당히 높은 수준의 외교적 수완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1815년 비인회의(Congress of Wien) 이후 19세기 세계 외교를 풍미한 조류는 ‘세력균형’이었다. 영국-러시아를 양대 축으로 하는 구도였다. 1860년 베이징 조약 이후의 동아시아에서도 영-러의 세력균형 하에 일본·프랑스·독일·미국 등이 세력증강을 도모하는 형세가 조성되었다. 이러한 동아시아 및 세계 외교의 흐름을 조선의 대외정책에 ‘수입’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고종이다. 그동안의 학자들의 많은 연구 활동에 의해 많이 개선되긴 했지만 아직도 고종을 무능한 군주로 인식하는 경향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고종이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기주장을 제대로 펴지 못했다고 인식하는 경향도 여전히 강한 듯하다. 하지만, 선악의 가치판단을 일단 떠나 고종이라는 인물이 상당히 명석한 인물이었다는 점만큼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는 세계 외교의 조류에 상당히 밝은 사람이었고, 또 그것을 조선의 대외관계에 응용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명성황후가 고종을 조종한 게 아니라 도리어 고종이 명성황후를 조종했음을 추론케 하는 정황 증거들도 찾아볼 수 있다. 그만큼 고종은 자신의 명석함을 숨기고 다른 인물들을 앞세워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인물이었다. 이러한 퍼스낼리티(성격)의 형성은 아버지 대원군의 그늘에서 지혜롭게 살아야 했던 소년시절의 경험에 기인했을 가능성이 크다. 고종이 실제로는 명석하고 또 대담하기까지 했다는 점은 개항 이후 세계열강을 조선에 끌어들인 것이 그의 수완 때문이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병인양요(1866년), 신미양요(1871년) 등의 사례처럼 19세기말의 조선은 외세의 침탈을 군사적으로 막아낼 만한 역량이 있는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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