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교양학과] 2022년 2학기 역사의현장을찾아서 중간시험과제물 공통(조선통신사 문화교류 등)
과제정보
학과 | 일본학과, 관광학과, 문화교양학과 | 학년 | 1학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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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목명 | 역사의현장을찾아서 | 자료 | 15건 |
공통 |
(1) 교재 2장을 참조하여 조선통신사 문화교류가 현재 한일관계에 줄 수 있는 시사점은 어떤 것인지 적어주세요. (10점, 1매)
(2) 교재 3장을 참조하여 상하이 와이탄에서 일어난 우리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서술해주...
(1) 교재 2장을 참조하여 조선통신사 문화교류가 현재 한일관계에 줄 수 있는 시사점은 어떤 것인지 적어주세요. (10점, 1매)
(2) 교재 3장을 참조하여 상하이 와이탄에서 일어난 우리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서술해주세요. (10점, 1매) (3) 교재 10장을 참조하여 일제 식민군항이었던 진해의 ‘부정적 유적’에 대해 서술하고, ‘부정적 유적’ 조사와 답사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어떤 점이 있는지 설명해주세요. (10점, 1매) |
목차
(1) 교재 2장을 참조하여 조선통신사 문화교류가 현재 한일관계에 줄 수 있는 시사점은 어떤 것인지 적어주세요.(2) 교재 3장을 참조하여 상하이 와이탄에서 일어난 우리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서술해주세요.
(3) 교재 10장을 참조하여 일제 식민군항이었던 진해의 ‘부정적 유적’에 대해 서술하고, ‘부정적 유적’ 조사와 답사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어떤 점이 있는지 설명해주세요.
- 목 차 -
1. 교재 2장을 참조하여 조선통신사 문화교류가 현재 한일관계에 줄 수 있는 시사점은 어떤 것인지 적어주세요.
2. 교재 3장을 참조하여 상하이 와이탄에서 일어난 우리의 역사를 기억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서술해주세요.
3. 교재 10장을 참조하여 일제 식민군항이었던 진해의 ‘부정적 유적’에 대해 서술하고, ‘부정적 유적’ 조사와 답사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어떤 점이 있는지 설명해주세요.
참고문헌
** 함께 제공되는 참고자료 한글파일 **
1. 상하이 와이탄에서 일어난 우리의 역사.hwp
2. 일제 식민군항이었던 진해의 ‘부정적 유적'.hwp
3. 조선통신사 문화교류가 현재 한일관계에 줄 수 있는 시사점.hwp
본문내용
1. 교재 2장을 참조하여 조선통신사 문화교류가 현재 한일관계에 줄 수 있는 시사점은 어떤 것인지 적어주세요.1) 조선통신사 문화교류
‘조선통신사’는 조선의 왕이 일본의 요청으로 1428년부터 1811년까지 일본의 실질적인 최고 통치자인 막부의 쇼군에게 파견한 외교사절을 일컫는다. 조선전기에는 조선에서 일본으로 ‘조선통신사’가, 일본에서 조선으로는 ‘일본국왕사’가 파견되었다. 비록 왜구에 대한 통제와 대장경의 증정으로 대표되는 불안정한 외교관계이긴 했지만, 양국은 사절단의 상호 파견을 통해 선린 우호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1592년 일본의 조선 침략(임진왜란)은 사절단이 서로 오가며 양국 우호를 상징하던 ‘평화의 길’을 신의를 저버린 ‘침략의 길’로 단숨에 바꾸어버렸다. 그 결과 양국의 국교는 단절되었고 양국 사절단의 왕래도 끊어졌다.
하지만 단절된 국교를 회복하기 위한 양국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쓰가 에도막부를 개창한 이후 자신들이 일본의 최고 권력임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민심을 복종시켜 통치를 쉽게 하기 위해서라도 조선과의 관계 회복이 필요했다. 조선도 전쟁의 상처 복구와 포로로 일본에 끌려간 백성들의 쇄환, 그리고 새롭게 부상한 후금의 위협 등 정치외교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일본과 국교를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이처럼 임진왜란으로 단절된 국교는 양국의 현실적 필요성에 의해 의외로 빨리 정상적인 관계를 회복하게 된다.
조선통신사의 파견으로 국교는 재개되었지만 일본에 대한 불신은 여전했다. 조선 조정은 일본국왕사의 상경을 금지하고, 조선 피로인의 쇄환과 함께 문화를 통한 일본 교화를 조선통신사 파견의 명분으로 내세웠다. 뛰어난 조선의 문화를 일본에 보여줌으로써 전쟁 재발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고, 문화적 우월감을 통해 전쟁으로 무너졌던 민족의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조선 조정에서는 외교적 실무와는 별도로 일본인과의 교류를 염두에 두고 조선의 문화적 우월성을 보여줄 수 있는 인재들을 대거 선발해 조선통신사를 파견하였다.
사절단에는 국가를 대표하는 고위 관리이자 학문과 문장으로 이름난 세 사신을 비롯하여 외교문서 작성과 시문 창작을 담당한 제술관과 서기, 환자의 치료를 맡은 의원, 명필가인 사자관, 음악 연주를 맡은 악사, 말을 타고 재주를 부리는 마상재인, 노정상의 풍광을 그린 화원 등 당대 조선에서 문학적 재능이나 기예로 이름난 인물들이 대거 포함되었다. 이처럼 각 분야에서 조선을 대표하는 재능을 가진 400~500명으로 구성된 조선통신사는 이미 그 자체로 문화교류 역량을 내포한 문화사절단이었다.
한편, 당시 일본은 쇄국체제로 외래문화와의 접촉이 제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고위 관료로부터 학자예술가 및 민중에 이르기까지 이국에 대한 호기심과 선진문화에 대한 기대와 열망이 커 조선통신사의 방문을 열렬히 반겼다. 대도시는 물론 고급문화를 향유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드물었던 작은 도시의 학자나 예술가들은 조선통신사가 머문 숙소를 찾아 밤을 지새며 교류를 활발히 전개했다. 조선통신사와의 접근이 제한되었던 민중들도 수십 년 만에 맞이하는 보기 드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국의 문화를 자신의 삶속에 기꺼이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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