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 한국사 한국 근대화에 이바지한 인물 보고서 (A+)
- 최초 등록일
- 2021.10.13
- 최종 저작일
- 20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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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앙대 한국사 리포트 과제입니다. A+받은 보고서에요!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김육의 유년 시절과 민생정치
2. 대동법
3. 대동법의 의의
Ⅲ. 결론
Ⅳ.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잠곡 김육(金堉, 1580~1658)은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조선 중기의 문신 중 하나로 우리에게 흔히 대동법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성리학의 이론과 원칙에 충실했던 여타 관료들과 다르게 김육은 경제 관료로서 17~18세기의 조선 경제 성장을 위한 제도 개혁을 실행했고 이러한 개혁은 근대적 세금 제도를 도입하고 후에 실학의 밑거름이 되어 실학의 선구자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대동법을 강력히 건의한 것 이외에도, 동전주화를 유통하고, 수레와 수체를 제작, 보급하는 등 민생을 안정시키는데 큰 기여를 하였으며 상업을 활성화 시키는 데에도 기여하였다. 이러한 안민정신에는 고된 노동을 해야 했던 가난한 유년기가 있었고, 이 과정에서 백성의 고충을 직접 체험하면서 그의 안민정신은 싹 트기 시작하였다.
이번 보고서에는 김육의 생애를 따라서 대동법을 중점으로 분석하여, 대동법이 가지는 의의와 대동법의 시행이 어떠한 이유로 근대화에 기여했다고 평가되는 연구해보자 한다.
Ⅱ. 본론
(1) 김육의 유년 시절과 민생정치
김육은 1580년(선조38년) 7월 14일 한성 서부 미포리에 태어났다. 김육은 기묘팔현(己卯八賢)의 4대손으로 그의 어머니도 기묘사화의 주요인물인 조광조의 동생 조승조의 손녀였다. 기묘사화가 일어난 직후 기묘사화와 관련된 인물의 자녀들은 과거를 볼 수 없었다. 과거를 다시 볼 수 있게 된 것은 1568년(선조원년)으로 김육의 가문은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김육의 아버지는 1585년(선조18년) 과거에 합격하였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피난길 중 사망하였다. 당시 김육의 나이는 15세로 젊은 나이에 가장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맡게 되었다. 김육은 1605년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성하게 되지만 1609년 동료들과 함께 청종사오현소(사림의 학문적 스승 5인을 문묘에 향사할 것을 건의하는 소)를 올린 것이 문제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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