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의 역사와 문화 - 중간고사 A+ 기출문제 모두 정리
- 최초 등록일
- 2021.09.18
- 최종 저작일
- 20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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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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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 신라 지방 지배의 붕괴
신라 하대는 선덕왕에서 경순왕으로 이어지는 시기로 크게 왕위계승전쟁으로 인한 혼란, 지방 세력의 성장, 반란의 형태로 진행된다.
780년 반란으로 무열왕계의 마지막 혜공왕이 죽고 김양상(선덕왕)이 즉위했다. 선덕왕은 성덕왕의 외손자로써 무열왕계로도 볼 수 있다. 선덕왕이 자손 없이 죽자 무열왕계인 김주원과 상대등 김경신이 경쟁하여 결국 김경신(원성왕)이 즉위했다. 이후 원성왕계에서 왕위를 이어나갔다.
지방 사회에서는 김주원, 김헌창, 장보고, 9산 선문이 성장하였다. 이 무렵부터 지방 사회가 성장하는 모습이 보이지만, 그 실체가 분명하지 않다. 때문에 반 신라적이라고는 하기는 어렵다. 하대 역시 통일 신라의 중요한 부분으로 이때부터 멸망을 논의하기는 좀 이른듯하다.
<중 략>
8.고려시대 호족 연합 정권설(기출문제 3번)
태조 이후 상당 기간 동안 왕권이 호족을 통제하지 못할 정도로 미약하여 성종 시기 중앙집권적 개혁이 추진될 때까지 지속되었다고 파악하고 있다. 호족들은 성주/장군 등으로 칭하며, 독자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앙 정부는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했고, 호족은 병부/창부 등을 설치하여 독자적으로 자기 영역을 지배했다.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통일도 호족들의 협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기에 왕건은 호족의 세력기반을 중앙의 행정력으로 흡수 할 능력을 가지지 못했고, 호족들은 자신들의 기반을 토대로 중앙에 참여했다.
호족은 자제를 개경으로 보냈지만, 본인은 그대로 해당 지방에 거주했다. 때문에 호족 세력은 사병을 유지할 수 있었고 중앙 정부는 이를 통제하기 위해 개경에 온 호족 자제에게 관직을 주고 고관의 딸과 혼인을 시켰다. 태조 또한 호족세력의 협조를 얻기 위해 적극적인 혼인정책을 시행하여 29명의 부인과 혼인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식들끼리 남매혼을 시켜 호족 가문세력을 줄이기도 했다. 태조 사후 5~6개의 가문끼리 왕위다툼을 벌인 것에서 이러한 예를 볼 수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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