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광해군의 실리외교의 배경 설명
임진왜란 이후 명의 힘이 약해지기 시작한 틈을 타 만주에서 여진족이 세력을 확장시키고 있었다. 여진족이 후금을 세워 명나라를 견제하자 명은 조선에 도움을 요청했다. 조선의 신하 대부분은 임진왜란에서 조선을 도와준 명과의 의리를 중시하여 명나라에 군사를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광해군은 명나라가 기울고 후금이 커가고 있는 상황을 파악하여 중립외교를 펼쳤다. 즉 광해군은 명의 요구대로 원군을 파견했으나 후금에게 조선군의 출병은 부득이한 것임을 밝히고 후금에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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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영조의 개혁정치
영조는 당쟁의 폐단을 지적하면서 탕평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탕평정책을 시행하였다. 영조는 왕권 강화의 목적으로 탕평책을 시행하였고, 자신의 세가지 업적중 하나로 뽑았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책은 자신에게 충성만하면 누구나 받아들이는 의미의 탕평이었다. 따라서 개인의 자격을 걸러서 받아들이는 영조의 탕평책은 정조의 탕평책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정조는 정조를 반대하는 세력을 칭찬할 정도로 자기 색이 분명하게 드러내야 새로운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고 독려했다. 그러나 영조의 탕평은 영조를 자신을 보필하는 새로운 특권당인 탕평당을 형성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때문에 다른 의식을 가진 이들이 영조에 충성을 바치기만 하면 받아들여져 의견이 모아지기 어려웠다.
영조 자신이 밝힌 영조의 업적으로는 균역법이 있다. 군포는 이중 삼중으로 수탈당하고, 바치는 양도 일정하지 않았으며,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채 군현단위로 군포를 거둬들였다. 이에 수령과 아전들은 백골징포, 인징, 족징 등과 같은 폐단을 일으켰다. 이러한 수탈에 농민들 가운데 형편이 나은 사람은 향리에게 뇌물을 주어 호적을 고치거나 공명첩을 사서 양반신분을 얻어 이에 벗어나려고 하였다. 때문에 그 부담은 가난한 농민층에게 더 집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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