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의 창건과 의암 손병희
문서 내 토픽
  • 1. 의암 손병희의 청년기
    손병희는 1861년 충청북도 청원군에서 태어났다. 아전(衙前)으로 일하는 아버지의 신분은 양반이었으나, 재가녀의 자식이었기 때문에 그는 서얼(庶孼)층에 속했다. 이에 따라 문중(門中)과 사회의 차별을 직접적으로 경험했을 뿐 아니라, 조선후기까지도 재가녀자손금고법(再嫁女子孫禁錮法)의 시행으로 재가녀의 자손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일찍이 공부를 그만두었다. 하지만 옥에 갇힌 친구 아버지의 석방을 위해 자기 집의 돈 있는 곳을 알려주거나, 심부름으로 관청에 공금을 내러 가는 중 눈길에 쓰러진 사람에게 그 돈을 구휼비로 줘 버리는 등 어린 시절부터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호방한 기질과 의협심이 두드러지는 면모를 보였다.
  • 2. 일본 망명과 진보회
    여전히 동학에 대한 탄압과 추적은 계속되었으며,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통한 개항 후 본격적인 서구 문명과의 접촉을 시작으로 1894년의 갑오개혁 등을 통해 본격적으로 등장한 문명개화론과 동학농민운동을 통해 드러난 근대 일본 문명의 강력함 등에 영향을 받아, 손병희는 동학의 새로운 종교적정치적 역할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으로 문명개화 노선을 택한다. 이에 따라 선진문명과 외부세상의 흐름을 체험하고 습득하여 동학을 보전하고 교단을 재건하기 위해 1901년 해외 유람을 결정했다. 일본에서는 이상헌(李祥憲) 등 가명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국사범(國事犯)으로 일본에 망명해 있던 개화파 인사, 권동진(權東鎭), 오세창(吳世昌), 조희연(趙羲淵), 이진호(李軫鎬), 박영효(朴泳孝) 등과 교류하였으며 권동진과 오세창은 이를 계기로 천도교에 입교하여 뒤에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으로도 참여하게 된다.
  • 3. 천도교 개칭과 교단정비 및 민족사업
    동학을 중심으로 근대문명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여전한 정부의 부정적 인식과 탄압 그리고 친일세력이라는 오해로 인한 사회의 부정적인 여론에서 벗어나 근대적 종교로서의 틀을 갖추고 공인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1905년 12월, 손병희에 의해 동학이 '천도교(天道敎)'라는 종교의 이름으로 개칭하고, 이를 『제국신문(帝國新聞)』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를 통해 광고하는데, 이것을 '대고천하(大告天下)'라고 한다. 이후 천도교는 조선 조정의 탄압에서 벗어나 공식적인 활동을 수행할 수 있게 된다. 손병희는 오세창과 권동진을 중심으로, 교육출판정치 등에서 문명개화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는데, 특히 『만세보(萬歲報)』의 발행과 보성(普成)학교, 동덕(同德)여학교 등 경영난을 겪는 학교들에 정기적인 재정적 지원을 함으로써, 국민 계몽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 4. 손병희의 문명 개화론과 천도교의 의의
    동학은 19세기 말 대내외적 혼란 속에서 방황하고 탄압 받던 민중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 주었다. 재래적이고 전통 친화적인 요소에서 비롯된 민중 친화성을 바탕으로 빠르게 퍼져나간 동학은 실학의 사민평등(四民平等)적인 맥락으로 호소력을 얻었으며 더 나아가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민족 구제 사상을 제시했다. 손병희는 단순한 서구 문명 학습과 서구적 근대성이 지닌 '힘의 차이를 통한 지배와 침략'이 바탕이 되는, 일반적인 서구적 문명개화론이 아닌, 인내천에 근거한 '상생과 조화를 근간으로 하는' 동학적 문명개화론을 주장했다. 이러한 인간성 중심적 민족자존(民族自尊)사상은 '도전'이라는 도의적 사회 건설의 바탕 위에 재전과 언전이 이룩되어야 한다는 '삼전론(三戰論)'이나 수신제가치국평천하론이 담긴 '명리전(明理傳)'과 항쟁과 다툼이 아닌 조화와 균형을 기반으로 진행된 갑진개화운동에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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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의암 손병희의 청년기
    의암 손병희는 1861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뛰어났으며, 특히 유학과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880년대 초반 그는 서울로 올라와 유학을 공부하며 당시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개화와 민족 독립을 위해 노력하는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이 시기 손병희는 민족의식과 개혁 의지를 키워나가며 후에 천도교 운동의 기반을 마련하게 됩니다.
  • 2. 일본 망명과 진보회
    1888년 갑신정변 실패 이후 위험에 처한 손병희는 일본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일본에서 그는 유학생들과 교류하며 개화와 민족 독립을 위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1890년 그는 진보회를 조직하여 한국의 독립과 개혁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진보회는 한국의 독립과 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고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이 시기 손병희는 민족 운동의 리더로 성장하며 후에 천도교 운동의 기반을 마련하게 됩니다.
  • 3. 천도교 개칭과 교단정비 및 민족사업
    1905년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교단 정비에 나섭니다. 그는 천도교를 민족 운동의 구심점으로 발전시키고자 했습니다. 천도교는 교리 정비, 교단 조직 강화, 교세 확장 등을 통해 민족 운동의 중심 세력으로 부상했습니다. 손병희는 천도교를 통해 교육, 문화, 경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민족 사업을 전개했습니다. 이를 통해 천도교는 민족 독립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고, 손병희는 민족 지도자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 4. 손병희의 문명 개화론과 천도교의 의의
    손병희는 서구 문명의 장점을 수용하면서도 전통 사상을 계승하는 문명 개화론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천도교를 통해 민족 정신을 바탕으로 한 근대화를 추구했습니다. 천도교는 민족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서구 문명의 장점을 수용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통해 천도교는 민족 운동의 구심점이 되었고, 손병희는 민족 지도자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손병희의 문명 개화론과 천도교의 활동은 근대 한국 사회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연세대학교] 한국근대사상사 - 2차 보고서 (천도교의 창건과 손병희)
본 내용은 원문 자료의 일부 인용된 것입니다.
2024.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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