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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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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유성룡|김문수
독후감
74
책소개 대한민국 국보 132호, 반성을 위한 전쟁의 기록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 동안 벌어졌던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징비록』. 이 기록은 조선왕조 최고의... <푸른책장 시리즈>의 『징비록』은 전체를 4부로 나누어 구성하여 이해를 도왔고,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게 풀어 썼다. 제1부에는 임진왜란이...
  • 징비록을 읽고
    징비록을 읽고
    반성과 변명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징비록懲毖錄》 -불구가 된 정보전략이 주는 교훈 1592년 동아시아에 사변이 있었다. 약 7년에 걸친 이 전쟁은 세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분로쿠 게이초의 역(役)이라는 일본식 명칭, 조일전쟁, 임진왜란이 그것이다. 이 사건은 굴욕적인 사대외교로 보장된 조선사회의 오랜 평화와 나태와 안일에 젖은 지배층의 생활습관이 수백 년 간 누적되어오다 마침내 중국 중심의 평화, 오늘날의 Pax-Americana에 가히 비견될만한 중화사대질서에 도전한 한 무사에 의해 일거에 깨어져 나간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을 갚는다는 명분하에 거병하여 그가 거의 다 일궈놓은 전국통일의 사업을 낚아챈 희대의 간웅이었다. 그의 꿈은 웅대했다. 그는 그 이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꿈꾸지 못했던 대사업, 대륙진출을 자신의 생애 동안 실천에 옮겼다. 일본에서는 무지막지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는 동안 조선은 연이은 당쟁으로 해소되기는커녕 더욱 격화된 정치적 문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내가 읽었던 징비록의 내용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한다. 조정에 첩보가 도착한다. 그 내용은 다름 아닌 ‘왜놈들이 변란을 도모’하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이에 조정에선 누가 가는 게 좋겠느냐를 두고 설전을 벌인다. 심지어는 ‘거짓’이다. ‘기우’다 하며 보낼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결국 조정은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를 결정해 일본에 파견한다. 정사 황윤길은 일본의 고압적이고 무례한 태도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장차 변란이 있을 것이라 예측했다. 반면 부사 김성일은 일본이 사신을 접대하는 태도에 대해 ‘호통’을 치면서 자국의 자존심을 바로 세워 ‘왜장’의 기를 꺾는 데에 사신활동의 대부분을 할애하였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풍신수길의 상이 ‘쥐새끼’상이라며 감히 쳐들어올 엄두도 못낼 것이라 잘라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잘못된, 그리고 거짓된 보고였음이 드러난다. <이하생략>
    독후감/창작| 2013.11.24| 5 페이지| 1,500원| 조회(257)
  • 징비록
    징비록
    징비록(懲毖錄)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것으로, 징비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조선 중기 선조 때의 서애 유성룡선생이 저술한 임진왜란에 관한 기록으로 임진 국난연구의 가장 중요한 문헌이다. 징비록이란 책 이름은 그의 자서에서 밝혔듯이 시경의 “내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날에 근심이 있을까 삼간다.”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이니, 곧 임진란 중에 일어난 일을 회고하고, 반성하여 뒷날에는 이런 낭패스러운 일이 없도록 미리 조심한다는 데 그 의미가 있다. ??임진왜란은 1592년(임진년)에서 1598까지 일본이 조선을 공격함으로서 시작한 전쟁을 말한다. 일본은 초반에 서울을 포함한 한반도의 상당 부분을 점령하였으나 이순신 및 권율 등의 명장들과 각 지방의 조선 백성들의 조직적 자발적 저항에 부딪혀 7년 만에 일본이 패하여 완전한 철수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제1차 침략을 임진왜란, 1597년의 제2차 대대적 침략 공세를 정유재란이라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구분해서 부른다. ?임진왜란은 조선 시대 최대의 위기이자 극복 이였으며 정치·문화·경제와 일반 백성들의 생활과 언어, 풍속에 이르기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전쟁 이였다. 이를 기점으로 조선 시대는 전기와 중기로 구분하기도 한다. 일본의 국왕 평수길은 일본 66주를 통일한 뒤 마침내 외국을 침략할 뜻을 품었다. 그는 우리 사신은 자주 조선에 가는데 , 조선 사신은 오지 않는다면서 귤강광을 우리나라로 보내 통신사를 보내달라고 요구한다.
    독후감/창작| 2013.10.18| 5 페이지| 1,000원| 조회(313)
  • 유성룡의 징비록을 읽고
    유성룡의 징비록을 읽고
    이 책은 임진왜란 중에 관직에 있었던 유성룡이 전쟁의 전개 과정과 실상에 대해서 자세히 적어 놓은 그런 책이다. 이 책을 통해서 단순하게 개념상으로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전쟁의 야욕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었고, 이순신 장군과 그리고 의병 등에 의해서 극복을 하게 된 것으로 알고 있었던 임진왜란에 대해서 그동안에 알지를 못했던 부분까지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일반 역사책에서 간략한 언급에만 그치던 전쟁 중 백성의 삶이 이 책에는 자세하게 묘사가 되어 있었다. 임진왜란의 유명한 장군이나 정치인들과는 달리 소홀하게 다루어졌던 일반 백성들의 고통과 당시 전쟁에 참상이 마치 오늘의 일인 듯이 참혹하게 느껴지게 되었다. 임진왜란 중에 가장 큰 피해를 당하게 된 백성들의 당시 사회적인 위치를 고려를 할 때에 나 역시도 사회를 주도하는 지도층이 아닌, 사회의 흐름에 순응을 해야만 하는 일반인의 입장으로서 이들의 사삶이 마치 나의 일인 듯 싶은 그런 감정이 느껴졌다. 이 책을 통해 일어나서는 안되겠지만 여전히 상존하는 전쟁의 가능성에 대해서 상기를 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의 참혹한 피해 묘사를 통해서 전쟁의 악마성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독후감/창작| 2013.06.11| 2 페이지| 1,000원| 조회(258)
  • 유성룡의 징비록을 읽고
    유성룡의 징비록을 읽고
    얼마 전에 월탄 박종화 선생의 ‘임진왜란’을 보고서 이 책을 언젠가 꼭 봐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는데 이렇게 빨리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이 책의 지은이는 유성룡, 조선조 대표적인 명재상이다. 그리고 이 책의 내용은 그가 7년간 직접 겪었던 임진왜란에 대해서 서술을 하고 있다. 사실 조선의 시각으로, 좁게 본다면 임진왜란은 어느날 갑자기 부산으로 새까맣게 덮고 들어온 왜적의 불시침공이지만, 조금 더 국제적인 정세로 본다면 예고된 전란과도 같았다. 그리고 유성룡은 그러한 점에 포커스를 맞추고 이 전란을 예측하지 못하여 율곡 이이의 10만 양병설 등을 묵살을 시켜버린 자신 스스로의 이야기를 글로 남김으로써 후대에는 이러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랬던 것 같다. 군사적으로 본다면 신립이 조령을 보리고 탄금대에 배수진을 쳐서 넓은 들판에서 싸워 왜군의 조총에 전멸당했던 것을 남겨 놓았고, 국내적으로는 성을 쌓을 때도 환경을 고려를 하지 않고 그저 큰 성만 쌓으려고 하여 방어를 할 때에 부족하였던 점을 적어 두었다. 그러한 점 때문에 징비록이 서적임에도 불구하고 국보로 지정이 된 것이 아닐까한다.
    독후감/창작| 2013.06.10| 2 페이지| 1,000원| 조회(173)
  • 징비록을 읽고나서
    징비록을 읽고나서
    징비록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서애 유성룡이 상황을 기록한 책으로 임진왜란의 시대적 상황과 임진왜란이라는 난리를 겪은 사람들의 시각을 알 수 있는 책이다. 징비록의 징비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으로 유성룡이 그이 저서에서 밝혔듯이 시경의 "내 지난 일을 징계하여 뒷날의 근심이 있을까 삼간다."라는 문구에서 따온 말이다. 즉, 유성룡은 이 징비록을 임진왜란 중에 일어난 일을 회고하고, 반성하여 뒷날 이러한 일이 없게 미리 조심하도록 경고하고자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이 책을 저술한 유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중에서 김성일과 동문수학하였고 명종 21년(1566)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예문관검열, 공조좌랑, 이조좌랑 등의 벼슬을 거쳐 삼정승을 모두 지냈다. 이 유성룡은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미리 알고 장군인 권율과 이순신을 중용하도록 추천하였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을 세울 것을 건의하고 군비확충에 노력하였다. 또한 도학·문장·글씨 등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가 죽은 후 문충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안동의 병산서원 등에 모셔졌다. <중 략> 임진왜란 발발 전 조선 조정 내에서는 붕당정치라고 해서 신하들이 두 파로 갈려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다툼을 벌였다. 서로 이익을 위해 인사권이나 정책 등을 무리하게 시도하거나 묵살시키기 위하여 논쟁을 벌여서 당시의 대외적 상황을 살피지도 않았고 그 때문에 이이의 십만양병설도 묵살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조선은 일본에 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동태를 살피려고 했으나 통신사로 파견되었던 황윤길과 김성일이 서로 다른 당파였으므로 엇갈린 주장을 하였고 결국 조선조정에서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전쟁의 대한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다.
    독후감/창작| 2012.09.16| 4 페이지| 1,000원| 조회(530)
  • 징비록
    징비록
    징비록. 이 책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서애 유성룡이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나는 징비록이란 책도 처음 보았고, 서애 유성룡이란 인물에 대해서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서애 유성룡이 어떤 인물인지 찾아보았다. 유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1566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삼정승을 모두 지냈다.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미리 알고 장군인 권율과 이순신을 중용하도록 추천하였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을 세울 것을 건의하고 군비확충에 노력하였다. 또한 도학,문장,글씨 등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가 죽은 후 문충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안동의 병산서원 등에 모셔졌다. 징비록은 서애 유성룡이 1592년에서 1598년까지 7년간의 기사로 임진왜란이 끝난 뒤 저자가 벼슬에서 물러나 있을 때 저술한 것으로, 책의 내용 가운데에는 임진왜란 이전의 대일관계의 상황도 일부 기록하였는데, 그것은 임진왜란의 실마리나 배경을 소상하게 밝히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책의 서문에 보면 서애 유성룡이 징비록을 집필한 까닭에 대해 적은 글귀가 있다. 『시경(詩經)』에 ‘予其懲而毖候患(여기징이비후환 : 내가 그 잘못을 뉘우치려 경계하여 나무[懲]라고 훗날의 환난이 없도록 삼가고 조심[毖]한다)’이라는 구절이 징비(懲毖)록을 집필한 까닭이라고 하였다.
    독후감/창작| 2012.07.24| 3 페이지| 1,500원| 조회(614)
  • 징비록
    징비록
    이 책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서애 유성룡(1542∼1607)이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징비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유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김성일과 동문수학하였다. 명종 21년(1566)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예문관검열, 공조좌랑, 이조좌랑 등의 벼슬을 거쳐 삼정승을 모두 지냈다.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알고 장군인 권율과 이순신을 중용하도록 추천하였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을 세울 것을 건의하고 군비확충에 노력하였다. 또한 도학·문장·글씨 등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가 죽은 후 문충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안동의 병산서원 등에 모셔졌다. 이것을 저술한 시기는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유성룡이 조정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지낼 때 전란 중의 득실을 기록한 것이다.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과의 관계, 명나라의 구원병 파견 및 제해권의 장악에 대한 전황 등이 가장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필사본『징비록』은 조수익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 필자 손자의 요청으로 인조 25년(1647)에 16권 7책으로 간행하였다. 또한 이것은 숙종 21년(1695) 일본 경도 야마토야에서도 간행되었으며, 1712년에는 조정에서『징비록』의 일본유출을 금할 정도로 귀중한 사료로 평가 받았다. 이 책은 임진왜란 전후의 상황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난중일기』와 함께 높이 평가되고 있다. 전란전의 일본국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일본의 국왕 평수길은 일본 66주를 통일한 뒤 마침내 외국을 침략할 뜻을 품었다. 평수길은 우리 사신은 자주 조선에 가는데, 조선 사신은 오지 않는다면서 귤강광을 우리나라로 보내 통신사를 보내달라고 요구한다. 조선에서 이를 거부하자 평의지를 다시 조선에 보낸다. 일본에 다녀온 황윤길은 일본의 정세를 시급히 보고하며 반드시 평화가 있을 것이라 말했다. 반면 김성일은 그러한 정세를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독후감/창작| 2012.03.11| 4 페이지| 1,000원| 조회(99)
  • 징비록 독후감
    징비록 독후감
    징비록 독후감 『징비록』은 서애 유성룡이 7년간의 왜란이 끝난 뒤 이 7년 왜란에 대하여 기술하여 후인들이 뒤에 있을지도 모를 환란을 미리 경계하도록 하기 위해서 기록한 책으로 본래 책의 제목인 징비는 『시경』 「소비」편에 나오는 문장인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 로부터 따온 말이라고 한다. “징비” 라는 제목답게 왜란 당시 조정의 고위관리였고 왜란의 책임자들 중 한사람이었던 그는 그의 실책들이나, 당시의 주위 분위기와 여러 상황들, 그가 생각하고 느낀 왜란의 발생과정, 원인… 등에 대하여 가감 없이 소상히 기록하였다. 몇몇 문장들을 예로 들자면 신립 장군이 왜군과 싸우러 가자 유성룡이 신립 장군에게 왜의 신무기인 조총을 조심하라고 하자 그가 “조총이라는 것이 쏠 때마다 맞는답니까?”라고 반문한 대목이나, 왜란 초기에 관군이 파죽지세로 왜군에게 밀려 임금이 의주까지 피난하는 대목, 파병 온 명나라 장수들이 전쟁은 뒷전이고 거드름만 피우면서 우리 군의 군량미를 축내면서 정작 싸울 때에는 싸우는 시늉만 하고, 전쟁에 패배하여 도망가는 등의 일을 목격한 대목, 민란이 발생하고 사람들의 심리가 어수선하여 매우 혼란스러웠던 당시 정세를 지적한 대목, 전장에서 바로 지휘자를 임명하여 군대나 민심을 수습하는 모습 등이 있는데 각 대목마다 전쟁이 발발하면 어떤 일들이 발생하는지를 사실에 비추어 소상히 기록함으로써 후세에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미리 대처할 수 있는 안목을 기를 수 있도록 했다. 문장 곳곳에서 그가 느꼈던 안타까움이나, 아쉬움, 절절함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독후감/창작| 2011.12.17| 3 페이지| 1,000원| 조회(2,407)
  • 징비록을 읽고
    징비록을 읽고
    징비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서애 유성룡(1542~1607)이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징비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유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김성일과 동문수학하였다. 명종 21년(1566)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예문관검열, 공조좌랑, 이조좌랑 등의 벼슬을 거쳐 삼정승을 모두 지냈다.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알고 권율과 이순신을 중용하도록 추천하였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을 세울 것을 건의하고 군비확충에 노력하였다. 또한 도학, 문장, 글씨 등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가 죽은 후 문충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안동의 병산 서원 등에 모셔졌다. 지금까지 역사 속의 전쟁과 관련된 책의 내용은 삼국지, 수호지, 그리고 최근 김진명의 고구려처럼 우선 영웅적인 핵심인물을 통한 묘사와 영웅적인 모습이 보여서 무엇인가 계속 흥미롭게 다음이 어떻게 전개될지 기대하면서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징비록은 그런 책이 아니었다. 책의 제목처럼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하는 책` 이었다. 읽어내려가는 책의 내용은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었다. 장수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이 자기가 먼저 살겠다고 도망가고, 조정의 대신들은 지금 여야가 그러는 것처럼 항상 자신들의 이익만을 쫓고 다가오는 전쟁에 대해서는 대비하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임진왜란` 은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을 우리가 만들어 놓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독후감/창작| 2011.11.29| 1 페이지| 1,000원| 조회(215)
  • 징비록
    징비록
    군사학_징비록(유성룡) 책을 읽어보기 전에 징비록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서 그 뜻을 찾아보았다. 징비의 뜻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임진왜란에 대한 생생한 기록. 이 책은 정말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조선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너무나도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이고 책에 집중하면서 내가 조선시대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의 현실 속에 있는 기분이였다. 시대는 임진왜란 전기와 전란이 발발한 뒤의 우리나라의 정세에 대해 기록된 역사이다. 이 책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중, 후 로 구분된다. 전에는 통신사의 보고부터 시작해서 중에는 유성룡이 있던 위치에서 세세히 기록한 전쟁의 참혹한 실상 후, 임진왜란이 끝난 후의 실상이 그대로 보여진다.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조선의 태평성대로 인해 관리와 문신, 무신들의 헤이가 그 끝이 없도록 팽배했으며, 긴 시간 관찰사를 보내지 않아 일본의 항의가 거세졌고, 일본을 근본도 없는 추한 민족이라 여기던 조정은 일본과의 교류를 매우 보잘 것 없는 행위라 여겼다. 일본의 통신사가 도착하여 조선 국민들의 나태함과 안일한 생각을 가진 것을 보고 곧 난이 닥칠 것이라 경고를 준다. 조선에서 열어준 잔치에서 보여진 아랫사람들의 흐트러진 기강을 보고 나라의 기강 또한 제대로 서지 못 할 것이라 생각한다. 일본의 사신은 조총 세 자루를 건내며 침략의 경고를 보내지만, 나태한 조정의 관리들은 그 의도를 꿰뚫지 못 하고 조총을 소홀히 두게 된다. 당시 조총의 위력에 대해 걱정을 많이 했던 유성룡이 ‘조총의 위력이 대단한데, 우리도 준비를 해야지 않겠습니까?’ 라고 우려하여 물으니 대답은 시원찮게 답했던 장수의 말이 생각난다. 이 부분을 보면서 솔직히 당황스럽기도 하고 너무나도 어이없기도 하였다. 그 당시 일본은 혼란속의 전국시대를 보내온 터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군사력과 군사기강이 확립된 상태였다. 조정의 충신들은 곧 큰 전란이 다가올 것을 예상하고 성지 구축과 군사력 증강을 건의 하였으나, 조
    독후감/창작| 2011.11.28| 2 페이지| 1,500원| 조회(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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