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일시티 이벤트
  • LF몰 이벤트
  • 서울좀비 이벤트
  • 탑툰 이벤트
  • 닥터피엘 이벤트
  • 아이템베이 이벤트
  • 아이템매니아 이벤트

징비록

검색어 입력폼
저자
유성룡|김문수
독후감
74
책소개 대한민국 국보 132호, 반성을 위한 전쟁의 기록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 동안 벌어졌던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징비록』. 이 기록은 조선왕조 최고의... <푸른책장 시리즈>의 『징비록』은 전체를 4부로 나누어 구성하여 이해를 도왔고,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게 풀어 썼다. 제1부에는 임진왜란이...
  • [독서감상문] 징비록
    [독서감상문] 징비록
    임진왜란과 관련있는 책으로 많은 사람들은 충무공 이순신장군님이 진중일기로 쓰신 난중일기를 많이 이야기한다. 하지만 임진왜란에 관련된 책에는 난중일기 뿐만 아니라 징비록이라는 책도 있었다. 징비록은 몇 년전 드라마로 방영되기도 하면서 유명세를 탔고 한때 징비록 열풍을 일으키기도 했다. 징비록은 류성룡이 쓴 책으로서 현재 국가적인 안보위기 사태에서 우리나라 안보상태와 관련하여 큰 도움을 줄것으로 예상되는 책이다. 그이유는 징비록은 일종의 반성문이기 떄문이다. 징비록의 뜻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으로 말그대로 역사적 교훈을 삼아서 다시는 이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자라는 뜻을 담고 있다. 때문에 징비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간 걸친 전쟁의 원인과 전쟁의 상황등을 책에 담고 있다. 징비록을 읽으면서 류성룡이라는 사람이 어떤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류성룡은 청렴결백의 대명사였다. 그가 청렴결백한 이유는 그는 물질적인 재산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독후감/창작| 2017.10.08| 2 페이지| 1,000원| 조회(429)
  • 징비록 독후감 작성-수정-최종
    징비록 독후감 작성-수정-최종
    책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상황을 담고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일본’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알려진 일본을 대체 어떤 시각으로 봐야할지 최근 일어나고 있는 한-일간의 외교문제와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저자세, 굴욕적인 외교적 태도들은 상당히 문제가 많아 보인다. <징비록>을 읽으면서 과거의 국난들이 어떤형태로 일어났는지 조금씩 알게될수록 오늘날과 비슷한 형태가 아닌가 싶다. 무능한 정치세력, 경직된 사회구조속에서 일본은 늘 강한 힘으로 조선을 시시탐탐 노려왔다. 어떻게 보면 한번도 조선반도에 대한 탐욕을 늦춰본적이 없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일본은 자신들의 내전상황과 집권정치를 외부로 돌리기 위해서 조선을 침략해왔고, 그런 상태를 정치적으로 잘 활용해왔다. 지금도 벌어지는 독도침탈의 야욕, 이러한 가운데 더욱 답답한 것은 일본의 눈치만 보는 정치인, 그리고 친일파의 행동들이다. <징비록>은 우리가 왜 당했는지에 대한 반성의 기록이다. 조상들은 우리가 왜 당했는지 왜 참혹한 역사를 경험하게 되었는지를 세세하게 기록하였다.
    독후감/창작| 2017.07.14| 4 페이지| 10,000원| 조회(147)
  • 징비록 독후감(서평), 대학과제, 5개 묶음
    징비록 독후감(서평), 대학과제, 5개 묶음
    세상의 모든 일은 마치 출렁이는 파도와 같이 변화의 연속이었고, 상승과 하강의 반복이었다. 특히 역사의 모든 페이지는 이런 파도와도 같았는데, 평화의 시기는 전쟁의 시기를 불렀고 전쟁의 포화(砲火)는 곧 고요한 평화를 낳았으니 역사란 얼마나 아이러니한 것인가를 깨닫지 않을 수 없다. 긴 평화의 시기는 그만큼 깊은 상처의 시기를 맞았으며, 망각에 의해 잊힌 역사는 처칠의 말처럼 되풀이되어 현실이 되었다. 영국의 사학자 에드워드 기번이 그의 책 『로마제국쇠망사』에서 말했듯 ‘지난날의 패배를 기억하지 못하는 새로운 세대’가 끊임없이 자라났으며 반복의 역사는 그 끝을 모른 채 지금도 시간 위를 달리고 있다. 요컨대 파동처럼 반복되어왔던 역사의 흥망성쇠는 인간의 망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역사의 흥망성쇠는 어떠한 망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특히 지금의 현재를 낳았던 바로 이전의 과거, 즉 조선의 역사는 무엇을 잊었기 때문에 반만년 역사에서 한 번도 겪지 않았던 식민지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나는 그 망각의 파편들을 1592년 임진왜란에서 찾았다. 전쟁 속 큰 상처에서 얻은 교훈을 망각한 채 조선은 결국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또다시 일제의 침략을 받았고, 외세에 의해 해방을 맞을 때까지 일제의 식민지였다는 돌이킬 수 없는 과오로 반만년 역사에 먹칠을 했던 것이다. 치욕의 역사를 감추려 했던 조선은 결국 현실에서 그 역사를 다시 맞게 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유성룡은 이런 반복될 역사를 미리 방지하고자 이 책을 지었을 지도 모른다. 즉, 그가 남긴 대표작 『징비록(懲毖錄)』은 반성의 기록이기에 앞서 망각에 대한 결투였으며, 후세에 전할 경고의 책이었으리라. 평화는 평화를 담보하지 못하는 법이건만 그의 책을 보면 임진왜란 직전의 상황에 평화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자만과 나태가 얼마나 극에 달했는지 알 수 있다.
    독후감/창작| 2016.11.20| 6 페이지| 2,000원| 조회(403)
  • 류성룡의 징비록 서평
    류성룡의 징비록 서평
    류성룡은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인 1542년 경상도 의성현 사촌리에서 태어났다. 류성룡의 집안은 명문가로 손꼽히는 안동의 풍산 류씨 집안이라 가문의 이력이 정말 대단했다. 류성룡은 어릴 때부터 그 총명함이 남달랐다. 4살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했는데 6살 때는 대학, 맹자를 읽고 8살 때는 이미 공자, 맹자의 이치를 다 깨달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란 만큼 총명하고 공부하기를 무척 좋아했는데 책 한 권을 읽어도 어려운 것이 나오면 반드시 혼자서 몇 번이고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자신이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야 해설 책과 자신의 생각을 맞춰 보았다고 했다. 류성룡의 침착함과 위기해결 능력은 어렸을 때부터 탁월했다. 류성룡은 16세인 1557년에 과거에 급제했고 1562년에는 퇴계 이황의 문하로 들어가 안동의 도산 서원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이황은 류성룡이 학문하는 자세가 매우 바르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의문이 풀릴 때9까지 물어보며 배운 것을 통해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며 실천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과연 하늘이 내린 인물이로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1564년 생원시 급제를 시작으로 이듬해에 성균관에 입학하고 1566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어 관직에 첫 을 들여 놓게 되었다. 그는 30년 동안 관직에 있었고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간 후 조정에서 다시 불러도 응하지 않았다. 언제나 고향집을 그리워했고 어머니에 대한 효심에 벼슬도 마다하는 효자였다. 1590년에 우의정을 시작으로 좌의정 영의정을 거쳐 삼정승이라 하는 관직을 모두 거쳤고 이후 약 10년 동안 정승의 자리에 있게 된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1592년 4월에 일어났다. 그는 회교 전문가였다. 그래서 조선, 일본, 명의 큰 정쟁에서도 막힘없이 관련된 일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문서를 만드는데 정말 탁월한 능력을 갖추었고 인재를 알아보는 탁월한 안목이 있었다. 이순신이 바로 그 기대에 충분히 보답한 사람이다. 왜란이 끝나고 조정에서 공과 죄를 논하는 자리에서 류성룡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명나라에 가지 않는다는 죄로 탄핵을 받게 되었다.
    독후감/창작| 2015.07.01| 5 페이지| 1,500원| 조회(431)
  • 고전해제-징비록 해제
    고전해제-징비록 해제
    1. 저작 배경 1) 저작의 시대적 배경 1. 임진왜란 임진왜란은 1592년(선조 25) ~ 1598(선조 31)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이 조선을 침입한 전쟁이다. 조선에 쳐들어온 일본군을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이 물리친 전면적인 동아시아 국제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임진년에 처음 발생하여 보통 ‘임진왜란’이라고 하며, ‘7년 전쟁’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1957년의 제 2차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만을 따로 언급할 때는 ‘정유재란’이라고 부른다. 2.16세기 후반 조선의 상황 조선은 15세기 말부터, 조선 초기 정치적 실권을 가지고 있었던 훈구파 세력과 이 시기 중앙 정계로 진출하기 시작하던 사림파 세력 간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면서 연이어 사화(士禍)가 발생했다. 1567년 선조(宣祖)의 즉위를 전후하여 사림 정치가 확립되었지만, 그들이 바라는 혁신은 선조의 구신계(舊臣系)에 대한 비호와 내부 분열로 인해 붕당 정치의 양상으로 변질되었다. 더욱이 세금의 과중한 징수 등은 민심의 동요를 가져왔으며, 군제(軍制)도 병농일치의 원칙이 붕괴되고, 지휘관들이 군사의 입번(立番)을 면제해주고 대가를 받는 풍조가 만연하면서 군사력이 약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율곡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하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3.16세기 후반 일본의 상황 조총은 16세기 포르투갈 선원들에 의해서 일본에 전래되었다. 포르투갈 선원에게서 받은 단 1자루의 조총을 일본 영주는 바로 분해하여 그 설계도를 그려 수 만 자루를 찍어냈다. 조총은 일본이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화력이 대폭 향상되었고, 교차전술을 도입하면서 연사력 문제도 보완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연합하여 1587년 전국을 통일한다. 도요토미 정권은 통일 과정에서 도시 부상(富商)들의 협력을 기반으로 대륙과의 교통 창구인 하카타(博多) 등을 장악하여 상권과 무역권의 통일적 확보를 꾀했다. 그리고 토지와 농민을 일원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전국적인 토지 조사와 호구 조사를 실시하고, 새로운 신분 규정을 정하는 등 체제 정비를 서둘렀다.
    독후감/창작| 2015.06.05| 7 페이지| 1,000원| 조회(151)
  • [서평] 징비록
    [서평] 징비록
    군은 병참이다. 천재 이순신이 12대 133의 명량을 위해 어떻게 물자를 조달하였을까? 그 핵심이 267쪽이다. <이 통행첩 없이 전라 경상 충청 삼도의 바다 근처를 오가는 모든 공선과 사선은 간첩으로 간주하여 통행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러자 배에서 피난 생활을 하던 자들이 모두 와서 통행첩을 받아갔다. 이순신은 그들이 탔던 배의 크기에 따라 차등을 두어 곡식을 바치고 통행첩을 받아가게 하였다. 큰 배는 석 섬, 중간 배는 두 섬, 작은 배는 한 섬이었다. 배에서 피난하던 사람들은 재물과 곡식을 모두 싣고 바다로 들어왔기 때문에 곡식 바치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았고 통행이 금지 되지 않은 것을 기뻐하였다. 그리하여 열흘 만에 군량미 1만여석을 얻을 수 있었다>현장에 답이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은 중국과 일본이 조선반도에서 전쟁을 하는 바람에 더 힘들어진 전쟁이었다. 유성룡은 경세가로써 난리를 극복하기 위해 백 퍼센트를 넘는 에너지를 다하였고 파직된 이후에도 결과를 남겼다. 덕분에 후손은 그의 뜻 이외에도 당시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었다. 이게 역사라는 것의 미션(mission)이다. 훗날, 앞사람의 어리석은 전철을 보고 배우라는 뜻 되겠다. 참고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은 이런 식이었다. (1) 57쪽이다.<용궁 현감 우복룡은 고들의 군대를 이끌고 병영으로 가던 중에 영천 길가에서 밥을 먹고 있다가 하양의 군사 수백 명을 만났다. 이들은 방어사에 속한 군사들로 상도로 향하고 있었는데 마침 우복룡의 군대 앞을 지나게 된 것이다. 우복룡은 군사들이 말에서 내리지 않은 것에 화가 나서 그들을 붙잡아 반역을 일으키려 한다며 트집을 잡았다. 하양의 군사들은 병마절도사가 발행한 공문서를 보여주며 해명하였지만 우복룡은 자신의 군사들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내 하양 군사들을 에워싸고 모두 죽이니 그들의 시체가 들을 가득 메웠다.
    독후감/창작| 2015.05.06| 3 페이지| 1,000원| 조회(303)
  • 징비록 독후감
    징비록 독후감
    “아! 임진년 전쟁의 재앙은 참으로 참혹했다. 한양, 개성, 평양을 수십 일 만에 빼앗겼을 뿐 아니라 조선 8도가 와해되어 임금께서도 파천하셔야 했다. … <시경>에 ‘내가 잘못을 징계하여 후환을 삼간다.(予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이 내가 <징비록>을 집필한 까닭이다.” 이는 <징비록>의 서문이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 겸 병조판서로, 국정과 외교•국방 전반에 걸쳐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전란의 종결과 맞물려 대립 세력의 정치 공세와 임금의 변심으로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낙향 이후 임진왜란 중 있었던 일들을 정리한 것이 바로 <징비록>이다.
    독후감/창작| 2015.04.29| 1 페이지| 1,000원| 조회(2,093)
  • 징비록
    징비록
    난 사실 역사 관련 책을 접할 기회도 많이 없었을 뿐더러,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 능동적으로는 잘 읽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과제를 통해 『징비록』을 접하게 된 건 여러모로 좋은 기회가 됐다. 첫째장, 둘째장,, 이렇게 처음 시작은 언제쯤 책장이 넘겨질까 싶을 정도로 읽기가 힘들었다. 내용 자체가 어렵기도 했지만 내가 접했던 ‘돋을새김’이라는 출판사의 한자 어투가 왜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던지.. 난 예전부터, 무슨 학문이 됐든지, 첫 시작은 쉽게 가야 그 분야에 흥미가 생기고, 어느 정도의 지식이 축적된다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조금 더 쉽게 풀이 되어 있는 『징비록』을 찾아 읽고, 그 후에 한자식 책을 읽어봐도 늦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찾아 낸 것이 ‘서해문집’ 출판사의 징비록이었다.
    독후감/창작| 2015.03.18| 3 페이지| 1,500원| 조회(336)
  • '징비록'의 줄거리 요약 및 느낀점 독후감입니다.
    '징비록'의 줄거리 요약 및 느낀점 독후감입니다.
    이 책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서애 유성룡이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징비란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유성룡은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김성일과 동문수학하였다. 명종 21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예문관검열, 공조좌랑, 이조좌랑 등의 벼슬을 거쳐 삼정승을 모두 지냈다. 왜적이 쳐들어올 것을 알고 장군인 권율과 이순신을 중용하도록 추천하였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을 세울 것을 건의하고 군비확충에 노력하였다. 또한 도학·문장·글씨 등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가 죽은 후 문충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안동의 병산서원 등에 모셔졌다. 이것을 저술한 시기는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유성룡이 조정에서 물러나 향리에서 지낼 때 전란 중의 득실을 기록한 것이다. 내용을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과의 관계, 명나라의 구원병 파견 및 제해권의 장악에 대한 전황 등이 가장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필사본 징비록은 조수익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 필자 손자의 요청으로 인조 25년에 16권 7책으로 간행하였다. 또한 이것은 숙종 21년 일본 경도 야마토야에서도 간행되었으며, 1712년에는 조정에서 징비록의 일본유출을 금할 정도로 귀중한 사료로 평가 받았다. 이 책은 임진왜란 전후의 상황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난중일기와 함께 높이 평가되고 있다. 고저지에 기록된 초본에 남색 천으로 표지를 하였다.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서 도체찰사를 겸하고 임진 지휘하였던 서애 유성룡이 난후에 귀향 정리한 저술 중의 하나이다. 그 내용은 난전의 교린사정과 선조25년에 발발하여 동왕 31년에 평정되었던 전황의 골자를 수기한 것이다. 우리는 이 기록을 통해 난전의 일본과의 교린관계를 비롯하여, 임전에 있어서의 국민적 항쟁, 명의 구원 및 제해권의 장악에 대한 저간의 전황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독후감/창작| 2014.03.27| 6 페이지| 1,000원| 조회(10,292)
  • 징비록
    징비록
    누구나 한번 쯤은 징비록이라는 책을 들어봤을 거라고 생각한다. 듣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건 그걸 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최근에 불고 있는 인문학적 열풍을 생각해본다면, 징비록은 500년전 우리의 선조가 남겼던 훌륭한 고전 인문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정확하게는 ‘유성룡’이라는 조선의 선비-정확하게는 신하-가 써놓은 작품이겠다. 유성룡. 아마 왠만한 사람이라면 그의 이름 한번쯤은 당연스레 들어봤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순신 장군의 친구. 맞다. 이순신이라는 거대한 이름 세자에 유성룡이라는 사람의 존재는 어쩌면 자연스럽게 가려진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과연 그의 존재가 이순신이라는 세자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느냐? 그건 또 아니다. 그는 실질적으로 조선의 최고의 직위라고 하는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이다. 심지어 그의 대손은 아직도 그 맥을 이어오고 있으며, 현재 연예인인 ‘류시원’의 집안이 바로 그 집안이다. 그렇게 긴 세월을 이어오고 있는 명문 집안이라는 이야기다. 이순신이 전라좌수영을 보낼 수 있도록 조정에 천거했던 게 바로 류성룡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전기 중간 곳곳에 나오고, 임진왜란을 본딴 게임등에서 긴 부채를 피고 펄럭이고 있는 류성룡이라는 사람의 존재가 조금은 다르게 보이는가? 아직 조금 더 부족하다면, 그가 해낸 일을 조금더 조사하거나 그가 쓴 글을 읽어 본다면 아마 확실히 달라 질 것이다. 그럼 류성룡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해보고 그가 쓴 징비록이라는 고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인문 고전이라고 한다면, 굉장히 읽기 어렵거나 힘들겠다고 생각을 할 수 도 있겠지만, 생각보다도 징비록은 그렇게 읽기 어려운 책이 아니다.
    독후감/창작| 2013.12.06| 3 페이지| 3,000원| 조회(488)
이전10개 1 2 3 4 5 6 7 8 다음10개
AI 챗봇
2024년 06월 11일 화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4:50 오전
New

24시간 응대가능한
AI 챗봇이 런칭되었습니다.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