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 항쟁에 관한 내용
- 최초 등록일
- 2008.11.09
- 최종 저작일
- 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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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삼별초 항쟁에 관한 내용
목차
몽고와의 기나긴 전쟁
몽고의 침략과 배경
1231년 몽고의 고려 침입이 개시되다!
서울을 강화도로 옮기다.
삼별초는 왜 봉기했나?
“나라를 돕고자 하는 자는 모두 구정(毬庭)으로 모이라“
삼별초의 새로운 거점 “진도”
삼별초 정부가 진도를 정부의 요지로 정한 요인
삼별초의 진도 정부 -삼별초의 몰락의 길
제주도의 항파두리에서 ‘붉은 오름’까지
제주정부의 약화요인
삼별초의 역사적 의의
민중의 호응이 있었던 삼별초 정권
과연 삼별초는 반란인가?, 항쟁의 꽃인가?
본문내용
몽고와의 기나긴 전쟁
몽고의 침략과 배경
그때 동아시아 정세는 인류역사상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인물로서 13세기 몽고제국의 징기스칸 출현 이후 통합을 이룩한 몽고는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며 세계 역사에서 일찍이 볼수 없었던 대제국을 등장시키면서 세계 역사를 크게 다시 쓰고 있었다.
고려 또한 그 흐름을 따라 몽고국의 침입으로 기나긴 전쟁의 소용돌이로 휩싸이게 되었다.
몽고의 고려 침입은 고종 18년(1231)에 시작되어 동 46년까지 되풀이 되었으며, 고려의 이에 대한 항쟁은 원종 14년(1273)까지 였으므로 그 기간이 무려 40여년에 이른다.
일단 우리 역사상 가장 장기적이고 치열했던 항전 사례이기도 하지만, 노비 혹은 지방의 농민들이 이에 광범하게 참여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주목되는 사건이기도 하다.
1231년 몽고의 고려 침입이 개시되다!
여.몽 양국간의 공식적 접촉이 개시된것은 고종 5년(1218)의 일이다.
당시 몽고군은 재흥을 도모하던 거란족을 공격하여 고려 영내에까지 추격전을 전개하였다.평양 부근 강동성에서 공동 군사작전으로 거란족을 섬멸한 양국의 지휘부는 1219년 초 형제의 맹약을 체결하였다.
이 무렵 고려는 1170년의 쿠데타의 의하여 정권을 장악한 무인 집권의 시대였고, 특히 집권하 최충헌은 정치권력의 안정을 이루는데 성공, 그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은 아들 최우에게 순조롭게 계승될 수 있었다.
거란족의 고려 침입으로 성립된 여.몽 양국의 불안한 초기관계는 1225년 공물 징수를 위하여 고려에 파견된 몽고 사신이 국경지방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파탄되었다.
몽고는 이 사건을 고려의 계획적 행위로 간주하고, 이에 대한 보복을 구실로 하여 고려에 대한 정복전을 개시하게 된것이다. 그러나 정작 고려에 대한 몽고의 침입은 금 혹은 송에 대한 군사적 조치의 일환으로서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