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1920년대 후반, 신간회와 함께 활동했던
항일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에 대한 리포트입니다
창립부터 해소되기까지의 전반적인 상황과 내용을 담고있음
목차
Ⅰ. 머리말
Ⅱ. 근우회의 창립과 활동
1. 근우회의 창립
2. 근우회의 이념 및 조직
3. 근우회의 활동
Ⅲ. 근우회의 해소
1. 내적요인
2. 외적요인
Ⅳ. 맺음말
본문내용
1. 근우회의 창립
1924년 이후 한국 여성운동은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의 여성운동으로 분화되어 전개되었다. 그러나 여성운동에서의 이 같은 분립노선은 일반적인 사회운동에서의 민족주의 운동 대 사회주의 운동의 분립과는 차이가 있었다. 여성운동에서는 민족주의계 여성운동이 뚜렷한 이념과 정체성을 보유하고 있지 못했으며, 사회주의계 여성운동과의 사이에 전면적인 대립관계가 형성되어 있지도 않았다. 민족주의 여성운동 진영에는 이미 침체상태에 빠진 초보적인 여성계몽단체들과 전망부재의 여성 활동가들이 존재했을 뿐이고, 그 중 활발히 움직인 기독교여성단체들의 경우는 여성해방보다 선교가 주된 관심사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여성운동의 이념 정립이나 주도권 장악문제 등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그러므로 여성운동계에서는 일반 사회운동에서와 같은 양 진영 간의 첨예한 대립이나 충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후 근우회의 결성과정과 근우회 운동의 전개과정에서 사회주의계 여성들이 주도권을 갖고 활동하면서도 양 진영의 여성들 간에 별다른 대립관계가 형성되지 않았던 이유도 이로써 설명되어질 수 있다. 즉,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 여성단체들이 별다른 큰 저항 없이 연합될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26년 12월 중반부터 무르익기 시작한 민족유일당 조직운동은 1927년 2월 15일 국내에 신간회를 창립하게 했다. 신간회 창립은 여성운동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 여성운동의 통합 단일화를 촉진했다. 그리고 그 해 5월 27일에 전국 여성계를 대표하는 근우회(槿友會)가 창립되었다.
근우회가 창립되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은, 재경(在京)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였다.
여성을 대표하는 단일화 단체의 조직은 동경여자유학생 출신이 중심이 되었고, 민족주의계의 대표적 여성 지도자인 김활란과 유각경은 이미 여성계를 대표하여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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