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다도예절 (조선시대)
- 최초 등록일
- 2008.01.10
- 최종 저작일
- 20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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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의 다도예절과 다문화에 대한 설명을 하였습니다.
목차
조선시대의 다문화
음다풍습 쇠퇴원인
다방과 다시
차의 생산
본문내용
조선시대의 다문화
◆ 고려시대의 선비들의 다문화를 이어받아 진지한 음다 생활을 했음.
차도 맑은 다탕이 주류를 이루어, 궁중제사에도 다탕을 썼고 사신에게 차를 하사한 것을 보아 잎차가 고급차로 자리잡게 되었다.
초기- 조정과 왕실에서 고려의 음다풍습을 잇는 한편 사신맞이 접견 다례나 주다례를 새로이 제정, 시행,
선비 다인도 매우 많았으며 대체로 소박했다.
중엽- 임진왜란 때부터 음다문화가 급격히 쇠퇴하게 되어, 차의 품격도 떨어졌고 다시나 다모등도 본래의 뜻이 없어지고 형식만 남음
말엽 - 다문화가 실학과 함께 중흥하게 되어 다산 정약용, 자하 신위, 추사 김정희, 최의 의순을 중심으로 음다풍습이 성하게 된다.
승려와 문인들의 교류가 활발하여 승려들이 손수 만든 차를 문인들에게 선물하는 일이 흔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전반적으로 고려 때 보다 음다 풍습이 쇠퇴하였으나1000편이 넘는 차에 관한 시나 글, 또는 민요가 전해오고 있고 대한제국 시대에도 차 팔러 다니는 차장사나 찻집이 있어 차를 사마실 수 있었으며, 식후에는 민가에서도 즐겨 차를 마셨으므로 우리의 다문화는 대중 속에 뿌리내려 면면히 이러졌다.
음다풍습 쇠퇴원인
주자학이 정치 이념이 되면서 불교는 이단으로 배격되어 절의 재정이 나빠졌다 이로인해 절이나 승려와의 교류도 적어져 차인구도 줄어들게 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