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김구와 이승만 비교
- 최초 등록일
- 2006.11.29
- 최종 저작일
- 2006.11
- 2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우리시대의 유명한 두 인물 김구와 이승만을 비교한 레포트입니다
a+를 받은 레포트로서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김구와 이승만, 두 사람 모두 우리에게 귀에 익은 인물들이다. 김구는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강직한 독립운동가로, 이승만 또한 미국에서 외교 독립운동을 펼치다 광복 후 귀국하여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이 두 사람에 대한 기존의 평가를 『해방 전후사의 인식』에서는 재조면, 검토 하려 하고 있다. 민족의 자주통일 독립운동의 관점에서 위의 두 사람의 행동과 사상이 재해석되어지며, 이러한 분석을 기초로 두 사람을 어떻게 비교 되는지 보도록 하겠다. 우선 해방 전과 해방 후의 시대를 구분하여 두 사람의 행적과 그에 대한 평가를 보고자 한다.
해방 전의 김구는 항일 투사다. 동학 농민운동에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민중의 투사, 항일, 반제 투사로 거듭난다. 이 당시의 김구에 대한 평가로 적극적인 항일 운동이란 측면은 민중적 이였으나 민중의 보편적인 염원을 조직화한 것이 아니라 항일의병 투쟁이 고조되던 그 당시에 한낱 일개 개인의 적극항일투쟁으로 시종했다는 것이 한계로 지적된다. 이후 임시정부에 몸을 담게 되는데, 특히 이승만 등의 분파주의와 비주체적 독립노선이 임정의 마지막 기강마저 흔들어 놓았던 시점에서 임시정부를 항일 무장 유격전의 본거지로서 근본적으로 개편한다. 의열단의 구성과 삼균제도의 건국 원칙이 바로 이에 포함된다. 이점은 피폐했던 당시 임시정부를 국내의 피해대중의 기대치로 끌어올리려고 했다는 긍정적인 점을 가지지만 한계점 또한 들어낸다. 의열단의 활동이 모든 항일운동을 무장 테러 유격전이라는 편협한 틀 속에 얽어매는 인상을 주었다는 점이다. 삼균주의 또한 이상주의적인 환상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41년 태평양 전쟁의 발발 이후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며 광복군의 훈련에 열중하다 해방을 맞이한다. 광복군의 질과 양에 개의하지 말고 항일전선에 직접 뛰어들지 못했음이 당시 김구의 실패로 지적될 수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