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송시열의 사상및 이기심성론
- 최초 등록일
- 2006.05.04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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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송시열의 사상적 트색과 이기심성론, 북벌론등을 요약했습니다.
목차
송시열의 생애
1.인심과 도심의 회복
2.태극 궁원론
3.형도기 삼단설
4.마음은 기다
5. 성정일리, 사칠합일
6.천리와 인욕
송시열의 북벌론
본문내용
♣ 송시열의 생애
송시열 (1607, 선조40년~1968, 숙종 15년)은 김장생의 문인으로 율곡의 성리학을 계승 발전시키고, 춘추 의리 사상을 천명한 철학자요 정치가였다. 그의 자는 영보(英甫), 호는 우암(尤菴)인데 충북 옥천에서 출생하였다. 우암이 후일 춘추 의리 정신에 투철했던 것에는 그의 부친 송갑조와 가풍의 영향이 컸다. 그의 부친은 사람됨이 절의(節義)를 중시하여 그의 형제들 모두 집안의 가풍을 잇는 삶을 살았다.
24세에 김장생의 문하에서 <<근사록>>, <<심경>>, <<가례>> 등을 배웠으며, 다시 신독재 김집(金集)에게서도 배웠다. 그가 12세 때 그의 부친이 우암에게 타이르기를 “주자는 후세의 공자요 율곡은 후세의 주자이니, 공자를 배우는 데 있어서는 마땅히 율곡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우암의 학문은 주자와 율곡의 정통 학맥을 잇고 가까이는 사계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27세에 생원에 합격한 이후 참봉(參奉), 효종의 사부(師傅), 지평(持平), 충주 목사(忠州牧使) 등을 역임하였으며, 36세 때 윤후와 논쟁을 벌였다. 효종은 즉위할 때부터 우암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컸는데, 어느 날 우암에게 털옷 한 벌을 하사하면서, “경은 나의 뜻을 모르는가? 요동의 풍상(風霜)을 장차 함께 달리자는 것이니라” 했다. 이는 효종이 은밀히 북벌을 기약한 것이었지만, 결국 효종이 일찍 죽게 되면서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때 효종이 죽자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조씨가 효종을 위해 몇 년의 복을 입어야 하는가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己亥禮訟), 우암도 여기에 직접 가담하여 윤휴와 대결함으로써 당쟁의 와중에 깊숙이 참여하여 큰 상처를 입었다. 그는 결국 제주도 유배지에서 서울로 압송 도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83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그는 정읍에서 운명하기 직전 제자 권하상에게 후일을 부탁하면서 “공·맹 이래 서로 전해 내려온 것은 오직 이 직(直) 자 뿐이며, 주자가 세상을 떠날 때 문인들에게 고별한 것도 이를 벗어나지 아니하였다”고 하여 직(直)을 유언하였다.
그의 문인으로는 권상하, 이단하, 이단상, 김만중, 김창협, 박광일, 정호 등이 있고, 저술로는 <<송자대전>>, <<주자대전차의>>, <<이정서분류>>, <<주자어류소분>>, <<논맹문의통고>>, <<심경석의>>, <<기축봉사>> 등이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