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은식과 백남운의 역사관에 대한 고찰 - 민족주의 사학과 마르크스주의 사학의 비교를 중심으로
- 최초 등록일
- 2019.11.18
- 최종 저작일
- 20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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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박은식과 백남운의 역사관을 비교하고 분석합니다.
목차
1. 박은식과 백남운의 생애 비교
가. 박은식의 생애
나. 백남운의 생애
다. 생애 비교
2. 박은식과 백남운의 역사관 소개 및 비교
가. 박은식의 민족주의 사학
나. 백남운의 마르크스주의 사학
다. 비교 및 고찰
3. 두 역사가의 비판들
가. 식민주의 사관에 대한 박은식의 비판
나. 식민주의 사관에 대한 백남운의 비판
다. 상호 비판점들
4. 결론 및 제언
가. 결론
나. 제언
본문내용
1. 박은식과 백남운의 생애 비교·
가. 박은식의 생애
백암(白巖) 박은식 선생은 황해도 해주군에서 1859년 9월 30일(음력)에 탄생했다. 10세부터 17세까지 아버지 서당에서 정통파 성리학을 공부했으며 이후 고향을 떠나 전국을 답사하며 견문을 넓혔다. 그러다 1880년(고종 17년)이후 정약용의 학문을 공부한 후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태도를 익히게 된다, 1885년, 박은식은 향시에서 특선으로 뽑힌 이후 몇몇 관직을 거치기도 한다. 이 시기에 높은 경지에 이른 그의 성리학은 서북지방은 물론 중앙까지 널리 알려진다.
갑오개혁과 광무개혁 이후 그는 서구의 문명에 충격을 받고 보수 유학자에서 동도서기론자(東道西器論者)로 입장을 바꾼다. 주자학에서 벗어나 양명학을 배운 것이 그 계기 중 하나로 작용한 것이다. 이후 그는 새로운 교육 체제를 주장하는데, 한성사범학교 교관을 하면서 그의 그러한 주장을 담은 「흥학설(興學說)」, 『학규신론(學規新論)』등 을 간행한다. 또한 그는 내각의 친일 행위와 기존 유교의 폐단을 비판한다. 이후 서북협성학교의 교장으로서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했지만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한다. 그러나 타 지식인들과는 다르게 전통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스스로 변화하려는 태도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이는 이후 민족운동에 큰 귀감이 된다.
1910년에 나라를 잃은 박은식은 동창학교(東昌學校)에서 역사 교사를 가르치며 민족혼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상하이, 톈진, 블라디보스토크 등을 다니며 독립운동에 활발히 참여했다. 1919년에는 임시정부에 들어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저술하여 일제의 탄압 속에서 독립운동을 총괄한다. 그는 1925년에 임시정부 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지만 노환으로 11월 서거하고 만다.
박은식은 그 시기에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역사 연구에도 몰두했는데 『몽배금태조』, 『동명성왕실기』, 『천개소문전』 같은 영웅전과 『한국통사』를 저술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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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승, 2006, 「식민지시대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역사인식」, 『내일을 여는 역사』 (25호)
방기중, 1990 「기획논문 : 백남운 연구 맥남운의 역사이론과 한국사 인식 -백남운=공식주의자라는 통념에 대한 총체적 비판」, 『역사비평』
오미일, 2006, 「식민지시대 사회경제 사학자들의 역사인식」, 『내일을 여는 역사』 (2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