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회화에 나타난 대외교섭
- 최초 등록일
- 2018.05.23
- 최종 저작일
- 20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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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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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중국. 서역관계를 중심으로
1.머리말
2.고구려 고역(땅의경계) 초기벽화의 성격
3.비한족 국가와의 대회교섭과 북방기운
4.동물투쟁양식과 현무(호반무) 의 도상형성 (종교,신화적주제의 미술작품에 나타난 형상)
5.맺음말
머리말
고구력 벽화고분은 80여기에 달하고 있다. 이 중 태반은 중국과 연관지은 것들이며 따로 서역관계에 (서남아시아)에 초점을 맞춘것은 없다고 해도 별반 다를 것 없음.
따라서 서역관계에 대해 새롭게 뼈대를 세워가는 일은 간단치 않음.
역사연구에서 대외교섭의 구체적인 실상은 고대의 문헌을 통해 파악하지만, 고구려 회화의 경우에는 거의 없다시피 하며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가 총 160여회의 대외교섭을 가졌2.고구려 고분 초기벽화의 성격
던 것은 사실이지만 회화관계에서 언급한 구절은 찾기 쉽지 않다.
안악3호분 벽화설명
안악3호분 벽화는 고구려 고분벽화 중에서 연대가 가장 오래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회화 수준은 발군의 기량을 보이고 있어 크게 주목되어 왔었다. 이 벽화의 성격에 대해 고고학자들은 각각 다른 견해를 표명하여, 왕릉 또는 동수묘라는 견해로 나뉘었다. 특히 벽화의 주인물이 임금만이 사용할 수 있는 백라관(고구려 임금이 쓰던 모자)을 쓰고 있으며 주변의 호위가 성상번(궁중에서 그릇을 맡아보던 하인)의 깃발을 들고 있는 사실이 지적되고 있다.
한편, 김원룡은 묘주에 관계되는 명문이 없고 그 호위장수의 인적사항만이 기록되는 사례는 불가능하다고 보아, 일단 묘지명대로 동수묘로 확신하여 왕릉설을 일축하고 있다. 그런데 중국학자들은 동수묘주에 동의하면서도 그 무덤을 동진(동쪽의 진나라)의 연호인 ‘영(길영)화(화할화)’의 묵서가 있는 점을 중시하여 그것과 연관지어 동진 남조묘로 규정하고 있다. 즉, 전연(나라이름)을 설립한 모용씨가 동진과 적대관계가 되면서 전연에서 고구려로 망명한 동수에게 동진의 관직을 준 것으로 해석하고 있음.
벽화는 당시 고구려화풍의 그 자체라고 할 수도 있고 중원화법(시대변화의 큰 단위들)을 반영 한 것일 수도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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