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후기의 대외 교류와 그 의의 (장보고의 청해진을 중심으로)
- 최초 등록일
- 2017.12.20
- 최종 저작일
- 20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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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序論
Ⅱ. 本論
1. 羅․唐․日 三國 航路의 要衝地로서의 淸海鎭
2. 아라비아․페르시아 등을 잇는 役割로서의 淸海鎭
3. 綜合商社的 性格의 淸海鎭
4. 淸海鎭 成立의 特徵 및 權限
4-1. 獨自的 貿易去來
4-2 政經一體的 貿易行爲
5. 中國, 日本에서의 장보고
5-1 中國에서의 張保皐
5-2 日本에서의 張寶高
Ⅲ. 結論
본문내용
結論
新羅의 對外貿易은 渤海, 唐과 日本, 그리고 멀리 아라비아와도 이루어졌는데, 公무역과 私무역이 동시에 행해졌다. 수출품은 주로 비단, 베, 금, 은, 인삼, 약재품, 공예품 등이었고, 당에서 들여오는 것은 비단, 서적, 사치품 등이었다. 당시에는 당으로 가는 교역로는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에서 상해 방면으로 가는 해로와 경기도 남양에서 산동반도로 가는 두 길이 있었고, 경상북도 울산항에는 아라비아 상인들도 출입했다. 당과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산동반도와 양자강 연안에는 신라상인의 거류지인 新羅坊이 생겨나고 新羅院으로 불리는 사찰이 세워지기도 했으며, 신라인들을 관리하는 新羅所라는 행정기관도 설치되었다.
당 및 일본과의 해상무역이 더욱 발달하면서 9세기 전반에는 지금의 전라남도 완도에 淸海鎭이라는 해군기지 및 무역기지가 설치되었다. 이곳은 당과 일본의 무역선이 지나가는 해로의 요지로서, 신라는 이곳에 1만여 명의 군대와 수백척의 배를 상주시키고, 당 및 일본과의 국제무역에 종사했다. 당에서 사들인 물건을 일본에 팔고, 당으로 가는 일본인들은 이곳의 배를 이용했다. 이 청해진의 大使를 맡은 이가 바로 張保皐 (혹은 張寶高)로서 그는 일본에서 해신으로 알려질 정도로 유명했으며, 당나라의 산동성 문등현 적산촌에는 法華院이라는 사찰을 세웠는데, 이곳에 모여드는 신도들이 250여 명이나 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한다. 장보고는 우리나라 최초의 무역상인인 동시에 국제적으로 명성을 날려 <바다의 왕자>로 불리기도 했다.
신라와 아라비아와의 무역에서는 주로 양탄자, 유리그릇, 향료, 귀금속 등이 들어왔는데 모두가 귀족들의 사치품으로 애용되었다. 신라의 유명한 處容歌에서 처용의 아내를 겁탈한 사람을 아라비아 상인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지금 전해지고 있는 處容舞의 가면이 매우 이국적인 것도 예사롭지 않다.
참고 자료
邊太燮,《韓國史通論》, 三英社, 2012, p143~p147
한영우,《다시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2009, p164~p165, p183~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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