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가마쿠라시대의 건축과 불상
- 최초 등록일
- 2016.11.16
- 최종 저작일
- 20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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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막부성립 초기에는 오랜 전통을 지닌 공가문화가 우세하였으나, 송․원 문화의 영향으로 소박하면서도 힘찬 무가문화가 생겨났다. 전란과 재해, 귀족세력의 몰락과 다이라(平)씨의 성쇠를 본 사람들은 더욱 더 현실부정의 말법사상을 가지게 되어 종교의 구원을 구하였다. 이러한 때에 나타난 것이 가마쿠라 신불교이다. 신불교는 계율․학문을 중시하는 구불교를 배척하고 염불․선에 정진하면 구제받을 수 있다고 하여 무사․서민층에 널리 퍼졌다. 신불교는 크게 정토종계․선종․니치렌종으로 나눌 수 있다. 신불교의 등장으로 나라의 구불교계에서도 혁신이 일어나 빈민․병자를 구제하고 도로와 다리를 건설하였다. 이런 정치적․사회적․종교적 배경과 함께 문화적으로도 새로운 경향이 일어났다. 가마쿠라 시대의 미술문화는 힘차고 합리적인 무가정권에 어울리는 강건하고 역동적이며 사실적인 형식이 성행하였고, 전통을 고수하였던 귀족계급에서는 앞 시대에 위에 한층 더 기교적이고 섬세한 형식을 구축하여 변모시켰다. 즉 건축에서는 장식적인 것보다 구조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였고, 조각에서는 힘있고 인간미가 넘쳤으며 더하여 초상을 조각하기도 하였다.
목차
Ⅰ. 時代 槪觀
Ⅱ. 鎌倉時代의 建築
1. 宋風-大佛樣․禪宗樣
2. 和樣과 新和樣
Ⅲ. 鎌倉時代의 佛敎彫刻
1. 慶派
2. 院派와 圓派, 善派
3. 東國의 중세조각
Ⅳ. 要約整理
본문내용
Ⅰ. 時代 槪觀
헤이안 시대 후기, 호겐(保元)의 난이 일어나자 섭관가인 후지와라씨(藤原氏)로부터 천황가는 무사의 힘을 빌어 정권을 잡았지만, 전통 귀족들의 무기력함이 노출되고 무사들의 실력이 입증됨으로써 막부정권 성립의 중요한 계기가 만들어졌다. 이후 12세기 말에 다이라씨(平氏)를 타도하고 정권을 쟁취한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는 정청(政廳)을 교토에서 가마쿠라로 옮기고 귀족정치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미나모토씨 쇼군은 3대에 걸쳐 끝나게 되고, 뒤를 이어 다시 고개를 드는 귀족세력을 누르고 호조씨(北條氏)가 집권을 하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강력한 막부정치가 시작된다.
그리고 1333년 천황이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와 함께 호조씨를 멸한 시기까지가 가마쿠라(鎌倉)시대라고 한다. 즉 1185년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정치적 실권을 잡아 막부를 세운 후 1333년 호조씨의 멸망까지이다. 정치적으로는 교토를 중심으로 하는 공가(公家)세력과 가마쿠라를 중심으로 하는 무가(武家)세력으로 이원적 지배에서부터 차츰 무사에 의한 통일적 지배로 이행되는 추세였고, 이는 사회․문화에도 그대로 반영이 된다. 초기에는 고대귀족의 문화적 권위는 정치적 지위와 더불어 여전히 유지되었으며 특히 권력을 획득해도 귀족문화에 필적할 만한 독자적인 문화를 지니지 못했던 무사는 귀족문화를 배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민중의 성장에 의해서 촉발된 무사세력의 상승으로 인해 곧 귀족사회에는 볼 수 없었던 민중적 요소가 풍부한 새로운 문화를 차례로 만들어 졌으며, 송(宋)과의 교역과 문화유입에 힘을 기울여 그 영향아래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게 된다. 한편 기존의 현세 이익적이고 귀족주의적이었던 불교는 깊은 자성이 뒷받침된 구제(救濟)종교로서 일반 서민에까지 폭넓게 확산되었다. 현세의 영화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자각하던 귀족은 점차 내세의 구원을 구하게 되고, 이러한 요구에 응해서 극락왕생을 설파하는 정토교의 교의가 제공되었다. . 반면 매일 생업에 쫓기던 민중에게는 극락왕생의 환각에 도취할 수 있었던 가르침보다는 염불이나 『법화경』을 열심히 독송하는 하층 수행자들의 신앙이 친숙하게 자리잡아 갔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