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개화 추진
- 최초 등록일
- 2014.12.30
- 최종 저작일
- 2012.09
- 4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목차
1. 고종의 친정
2. 수신사, 신사유람단, 영선사, 조선보빙사
1) 수신사
2) 신사유람단
3) 영선사
4) 조선 보빙사
3. 통리기무아문
4. 사회 개혁
본문내용
1.고종의 친정
1872년 대원군의 10년간의 섭정을 끝으로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었다. 고종은 친정 초기에 박규수, 이경하를 비롯한 대원군파, 중도의 안동 김씨세력, 흥인군, 김병학을 비롯한 대원군 반대파를 골고루 등용하여 조정의 균형을 잘 맞추었고 대원군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민승호, 민겸호를 비롯한 여흥 민씨들에게 힘을 실어준다. 고종은 대원군의 개혁을 대부분 계승하여 호포제, 사창제, 서원철폐 등을 고수했고 만동묘는 복구는 시켜주었으되 국가가 제사를 주관하게 하여 유림의 명분은 충족시키고 힘은 돌려주지 않았다 당백전 만큼은 아니지만 화폐 경제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있던 청전을 혁파했고 문세도 없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후 운요호 사건을 통한 개항과 강화도 조약을 시작으로 조선의 개화는 시작된다.
2.수신사, 신사유람단, 영선사, 조선보빙사
1)수신사
1876년 2월 27년 체결된 강화도 조약이후 조선 조정에서는 개화의 필요성이 더욱 대두되었고
1876년 4월 4일 예조참의 김기수(金綺秀)를 필두로 한 76명의 인원이 일본에 제 1차 수신사로써 파견되게 된다. 약 2개월간 일본의 원로원·의사당을 비롯하여 육군성·해군성·내무성·문부성·대장성과 경시청·개척사 및 육해군의 군사시설과 훈련상황, 박물관·소방훈련 등의 시찰을 마치고 돌아온 된다. 비록 일본의 기술을 가지고 올 수 없었지만 고종은 더욱 개화의 필요성을 확립하게 된다. 1880년 김홍집(金弘集)을 필두로 58명을 제2차 수신사로 파견하여 일본의 실정을 정탐하도록 하였으나 주요한 현안은 알 수 없었고 일본의 시설 견학을 마치고 황준셴[黃遵憲]에게 [조선책략(朝鮮策略)]을 받아서 귀국하게 되었다.
참고 자료
한국사 38 개화와 수구의 갈등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