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역사] 매춘의 역사, 한국매춘, 외국매춘
- 최초 등록일
- 2014.10.13
- 최종 저작일
- 20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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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한국매춘의 역사
1) 한국 매춘의 시작
2) 일본의 강점이 남긴 것
3) 미군이 남긴 것
4) 양공주 (60년대)
5) 기생관광 (70년대)
7) 티켓다방(80년대)
2. 성매매금지법
본문내용
1. 한국매춘의 역사
1) 한국 매춘의 시작 매춘의 기원은 바로 일본 제국주의 침투와 해방 후 미국 군정의 영향이 계속되는 과정에 있다. 지금과 같은 한국의 매춘현상을 역사적으로 이끌어오게 된 직접적인 요인은 전쟁과 외국군대의 주둔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조선조 이전에도 ‘밀매음’의 형태로 일종의 매춘이 이루어졌나는 증거가 나타나며, 조선조 말기에 이르러서는 기생 외에도 유녀라는 신분의 여성 집단이 새로이 등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들의 매음행위는 어디까지나 관기들의 겸업업종의 형태였고, 조정에서는 이러한 매춘을 공인했던 적도 없었다.
2) 일본의 강점이 남긴 것
일제의 매춘문화 유입으로 기왕에 나름대로의 힘을 갖지 못했던 조선의 ‘성문화’는 기형적으로 자리잡히기 시작하였다. 조선 공창제도의 특징은 일본 국내에서 시행되던 방식과는 사뭇 달랐다. 즉 풍기단속을 위해 유곽을 따로 설치하는 식이 아니었다. 조선의 공창은 시대에 산재되어 있는 상태에서 매음업을 공허하면서 매음부의 성병검사를 중심으로 공창화를 실시하였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조선사회 전반에 매매음을 스며들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여성을 성적도구로 삼는 성의식을 확산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 사실 공창제도 중에서 매음부의 성병검사가 함께 이루어졌던 것은 일본 군대의 강병책 때문이었다. 그 실질적 의미는 매음부의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성적 도구의 ‘안전성’을 확보하려는 데에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허무주의 심리가 서로 섞이고 어우러진 영향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심리적 압박을 해소하고 보상받기 위한 배출구로 기왕에 만들어져 있던 매춘문화를 이용하는 것이 편리하였기 때문에 이후에는 한국인 스스로가 이러한 문화를 조장해 나가거나 이에 편승하려고 했던 것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① 유곽
유곽은 공창들을 집창 방식에 따라 일정구역 내에 집단적으로 거주시킨 공인매음업소 또는 공인매음지역을 뜻한다. 매음업자를 일정한 곳에 모아 특수사회로 고립시키는 한편, 보호함으로써 사창이 일반주거지역으로 침투·난립하는 것을 단속한다는 취지에서, 1585년 일본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오사카의 게이세이초를 유곽지대로 공인한 것이 시초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