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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 등록일
- 2013.04.27
- 최종 저작일
- 20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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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이승만정부(제1공화국)의 출범
Ⅲ. 이승만정부(제1공화국)의 정당
Ⅳ. 이승만정부(제1공화국)의 민족주의
Ⅴ. 이승만정부(제1공화국)의 통치조직
Ⅵ. 이승만정부(제1공화국)의 불법계엄령(제주 4 3계엄령)
Ⅶ. 이승만정부(제1공화국)의 통일정책
1. 정부수립 후 동란, 휴전까지
2. 제네바 회담이후 4?19 까지
Ⅷ. 이승만정부(제1공화국)의 종교정책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서론
임정이나 이승만 모두 자신의 조직기반과 활동력을 과장하여 미국 정부에 접근하였는데, 이러한 방식은 오히려 이들의 정치적 의도만 미국 측에 노출시키는 결과를 빚었다. 또 자신의 활동을 통하여 입장을 관철시킬 만한 힘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전후 한반도를 둘러싼 미?중간, 미?소간, 중?소간 이해관계의 상충, 전후 국내정세와 정파간 역학관계 등을 들어 미국의 후원을 얻으려고 하였다.
즉 임정은 대미교섭시 중국이나 소련의 한국에 대한 영향력 독점을 막기 위해서 미국은 임정을 승인해야 한다는 암시를 거듭하여 표시하였고, 이승만의 반소선전은 거의 노골적인 것이었다. 특히 이승만은 종전이 다가옴에 따라 반소선전의 강도를 높여갔다. 1945년 국제연합 창설을 위한 샌프란시스코회의를 전후하여 이승만은 미국이 얄타에서 소련에 한국을 떠넘기려 했다는 비밀협약설을 언론에 흘려 반소선전에 열을 올렸다. 얄타밀약설에 대한 이승만의 언론플레이는 미국 측 구도의 배후를 소련과 연결시켜 그의 반소반공선전을 관철시키면서, 사실은 미국의 의도를 떠보거나 그의 반대세력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다.
<중 략>
(二)우리는 연합국과 우호관계에서 협력할 것이며 극동평화유지에 응분의 노력을 경주할 것이다.
(三)재중경의 우리 임시정부가 연합국의 승인 하에 환도하면 1년 이내에 국민선거를 단행할 것이요, 1919년에 선포된 독립선언서와 동년에 한성에 건설된 임시정부의 취지에 의하여 천명된 민주주의의 정부원칙을 어디든지 존중할 것이다.
이처럼 이승만은 이 인식사항의 3항에도 자신을 집정관총재로 선출했던 한성정부의 정통론을 강조할 것을 잊지 않았다.
결의서에 대한 수정위원으로 여운형, 안재홍, 박헌영, 이갑성 네 사람이 선출되었고, 집행위원총본부구성에 들어가 집행위원 7명의 인선을 이승만에게 일임하고 폐회했다. 후일 좌익계가 떨어져 나간대로 이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이승만의 정치적 기반이 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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