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교회사 - 중세 후기 교회의 폐해
- 최초 등록일
- 2012.09.30
- 최종 저작일
- 2012.09
- 2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근대 교회사 역사
목차
1. 중세 후기 교회의 폐해
2. 긍정적 가치
3. 종교와 생황의 합일
4. 개혁의 요구
5. 유명론
6. 인문주의와 성서주의
본문내용
중세 후기 교회의 폐해
종교개혁의 발생은 중세교회 안에 너무나 많은 폐해가 존재하였기 때문에, 종교개혁이 오지 않을 수 없었다고 정식화할 수 없을 만큼 매우 다층적인 문제이다. 반 교회적인 발전 대신 교회 안에서 개혁운동이 일어나 내적인 부흥으로 이끌 수도 있었고, 아니 이끌어야 하였다. 새로운 종교개혁 연구는 종래의 관례적인 흑백이론을 극복하고 중세 후기 교회의 절대적인 타락에 대한 지금까지의 매우 왜곡되었던 모습을 올바른 위치로 옮겨 놓았다.
중세 후기 교회의 폐해
폐해는 도처에 있었다. 여기에는 성인이나 유해에 대해 종종 불건전한 공경과 제어될 수 없는 순례, 가지각색의 외형적인 기도형식에 빠진 종교생활의 기형적인 부분들이 있었다. 또한 경신, 기적광, 미신, 지옥과 마귀에 대한 공포와 병적인 마녀 망상은 이러한 신심을 매우 무겁게 압박하였다. 교회 행정상의 폐해들도 있었는데, 그것은 순전히 물질적으로 구성된 조세제도에서 존재 이유를 찾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또한 성직자와 편신도의 심한 도덕적 폐단과 과오도 있었다. 사제, 수녀, 수녀들의 부도덕한 생활에 대한 비난을 받은 것이다. 더욱 나빴던 것은 신분과 공동체 전체, 아니 거의 수도원 전체가 부도덕한 생활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폐해가 바로 제도에 기초해 있는 것 같은 것이 더욱 심각했다. 교황직 자체가 결점이었고, 악순환이 벌어졌다. 나쁜 추기경들이 나쁜 교황들을 선출하고, 또 나쁜 교황들이 다시 나쁜 추기경들을 임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교직 역시 봉건적인 속박에 매여 있었기에, 거기서 거의 해방될 수 없었다. 극히 이기적인 귀족이 주교좌 성당의 참사회를 만들고, 이 참사회원들이 자신들 가운데서 주교를 선출하고, 선출된 주교는 다시 귀족에게 예속되어 그들에 대하여 의무를 지게 되었다. 교회 내에서 귀족의 독점권을 분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고, 그것은 불가침적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더불어 정치적인 속박도 존재하였다. 즉, 친족정치에 속박됨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