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궁중미술과 시장미술
- 최초 등록일
- 2009.08.09
- 최종 저작일
- 20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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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당대부터의 중국 미술사의 양축 궁중 및 시장미술을 비교
목차
◈ 당
▷ 궁중회화
◈ 송나라
▷북송의 궁중 미술
▷남송의 궁중미술
▷송의 시장미술
◈원
▷궁중미술
▷시장미술
▷시장미술
◈ 청
▷ 초기 궁중미술
▷ 도 자
▷건륭제 ; 청대 중기의 미술
▷청말기 궁중미술
◈결론
본문내용
중국의 역대 왕조는 대규모의 예술작업을 실현할 수 있는 인적, 물적 자원을 확보하고 있었으므로, 오래 전부터 궁중은 미술 제작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지배층은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는 이념과 지지가 필요했는데, 종종 미술작품에 내포된 상징적인 측면이 이러한 요구를 만족시켰던 것이다. 통치자들은 가까이에 지식인들을 두고 상징적이며 정치적인 성격을 띤 예술 계획을 해석하게 했다. 또한 미술가들에게 통치자의 업적을 기록하고 분류하게 하였다. 그래서인지 왕실을 제외하고는 거대한 규모로 종교적 색채를 띠지 않은 미술을 후원할 수 있는 중심지는 그리 많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당대 이전에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궁중 생활과 관련되지 않는 기록물은 거의 없었다.
◈ 당
▷ 궁중회화
당나라의 장안은 중국의 곳곳에 흩어져 있는 천재 예술가들을 끌어들이는 지역이었다. 당시 미술가들에 대한 문헌기록이 많이 남아 있어, 작품은 남아 있지 않더라도 그들이 어떠한 상황에서 작업을 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작품은 무엇이었는지 충분히 짐작 할 수 있다.
847년 장언원은 [역대명화기]라는 화론서를 완성하였다. 이 책에는 500년경 이전부터 당시까지 활동한 370명이 넘는 화가들의 생애와 일화가 담겨 있다. 화가들이 주로 사용했던 그림의 소재와 양식, 그리고 화가들의 재능에 따른 등급도 기재되어 있다.
장언원이 재능에 따라 화가들의 등급을 매긴 최초의 저술가는 아니었다. 장언원은 단지 궁중에서 사용되던 관료의 서열 품계를 빌려 화가들의 우열을 가려냈던 것이다. 그는 당시 이미 존재했던 원칙을 따라 화가들의 사회적 지위와 예술성이 서로 깊은 관련이 있다고 판단하여 이 점을 등급결정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여겨진다. 장언원은 또한 미술의 ‘거장’과 ‘창시자’의 기준을 정했는데,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