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통신대학교 2020학년도 2학기 기말시험] 역사의현장을찾아서(공통)(근대화와도시의변모,인천,대전,대구,근대화시기)
- 최초 등록일
- 2022.01.14
- 최종 저작일
- 2020.11
- 5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3,000원
소개글
2020학년도 2학기 기말시험(온라인평가)
역사의현장을찾아서(공통)
1. 교재 제4부 ‘근대화와 도시의 변모’를 참고하여 자신의 거주하는 지역을 답사하면서 근현대시기동안 변모의 흐름을 찾아볼 것.
2. 답사를 하기 어려운 경우 교재 제 4부에서 사례로 든 인천, 대전, 대구 세 도시의 근대화시기 변모의 양상을 비교할 것
목차
Ⅰ. 인천의 근대화시기 변모 양상
Ⅱ. 대전의 근대화시기 변모 양상
Ⅲ. 대구의 근대화시기 변모 양상
Ⅳ. 세 도시의 근대화시기 변모 양상
Ⅴ. 참고문헌
본문내용
조선은 1876년 2월 일본과 ‘조일수호조규’를 맺으면서 개항을 결정했다. 이로써 세계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되면서 주변국들의 침입이 시작되었다. 일본은 부산과 원산에 이어서 인천의 개항까지 요구하였고 이에 조선은 1883년 1월 인천을 개항했다. 이어서 1883년 9월에는 ‘인천구조계약서’가 체결되어 인천에는 일본의 전관조계가 설정되었다. 이 약서에 따르면 일본인은 거의 무상으로 조계지를 대여 받을 수 있었고 자유로운 통상활동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조계에서는 조선 정부는 일본인에게 어떠한 세금을 징수할 수 없었다. “개항 후 제물포에는 영사재판권이 인정되는 치외법권 지대인 조계, 외국은 잡거가 허용되는 조계밖 10리 이내, 조선인만의 지대인 내지가 설정되었다. 최초 일본조계의 협소함으로 인해 일본인들은 조선인 거주지대로 침투해 들어왔다. 청나라도 조계 설정에 나섰으며, 청일 전쟁 후에도 조계를 유지했다. 각국조계는 4지구로 구분된다.” 따라서 조선인들은 각국조계의 외곽지대에 분포하였다. 인천은 개항 이후 급속도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나갔다. 인천 개항장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인구의 증가와 거주민 구성의 변화였다. 인천 개항장에는 조선인과 일본인은 물론 청국인 인구가 꾸준히 늘었다. 자연스럽게 조계 내의 외국인 유입이 급증하면서 자본주의가 새로 소개되었다.
참고 자료
송찬섭 외(2020). 역사의 현장을 찾아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문화원.